허머스, 바다, 그리고 사막: 이스라엘 내셔널 트레일 1,000km 5
- 어제 어디서 잤어? 설마 야영을 한 건 아니겠지? 비가 엄청 많이 오던데!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이 울린다. 레아의 문자다. 웃음이 피식 새어나온다. 고작 하루 만난 사이인데. 헤어진 지 사흘이나 되었는데. 우리를 이렇게 걱정해 주는 게 어이없고 고맙다.
“오늘은 꼭 디숀(Dishon) 마을에서 머물러야 해. 식량을 보충해야 하니까.”
배낭을 정리하며 내가 말했다. 근데, 오늘도 샤밧이라 거기도 안 열거 아니야. 싱크대에서 물을 리필하고 온 D가 말했다.
“거기서 야영을 하고, 내일아침 상점 문 열 때까지 대기해야지.”
식량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돌림 마개가 있는 밀폐 용기에 쿠스쿠스와 물을 담았다. 이렇게 해 두면 별 조리 없이 한 시간 후에 먹을 수 있다. 배낭에 넣고, 출발.
길은 숲길로, 그러다 광활한 전망이 내려다보이는 산길로, 그 후엔 소들이 방목되어 있는 평야로 이어졌다. 소똥이 가득한 길을 한참 걸으니 석류 밭이 보인다. 수확 시기를 놓쳤는지 커다란 석류들이 땅에 마구 떨어져 있다. 아까워라…. 딱 한 개만, 아니 두 개만 먹었으면….
“영어가 안 통해.”
전화를 끊고 내가 말했다. 트레일 엔젤 홈페이지에 따르면 디숀 마을에는 트레일 엔젤이 두 명 산다. 그런데 한 명은 전화를 받지 않고, 한 명은 말이 안 통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음 마을까지 갈 수는 없다. 식량을 구할 수 있는 내일 아침까지 이 마을에서 버텨야 한다.
“이 체육관…. 이 안에 화장실 있지 않을까? 수도꼭지도 있을 테고….”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디숀 마을 체육관. 굳게 잠긴 거대한 자물쇠를 노려보며 D가 말했다. 체육관이 닫은 것도 샤밧 때문이겠지. 샤밧만 아니었다면 상점에 가서 식량도 마음껏 사고 체육관에 들어가 물도 펑펑 떠 마셨을 텐데…. 샤밧만 아니었으면 훨씬 수월했을 오늘의 인생…. 하지만 오늘 하루 우리가 불편하다고 타문화나 타종교를 탓하면 안 된다…. 안 돼….
인터넷을 뒤져 디숀 마을에 있다는 캠핑장 전화번호를 찾았다. 전화를 받는다. 영어도 통한다. 한데 캠핑장 운영은 몇 년 전에 접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혹시 마을에 캠핑할 수 있는 데가 있냐고 물었다. 남자가 우리가 있는 마을 체육관 옆 공터를 알려줬다.
“혹시 누가 여기서 캠핑하면 안 된다고 뭐라고 하면, 폴이 해도 된다고 했다고 제 이름을 대요. 물이나 다른 거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하시고요!”
이렇게 고마울 수가.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사실 지금 당장 물이 필요하데 소심해서 말하지 못했다. 다시 전화할까…. 필요한 게 있으면 미안해하지 말고 직접적으로 바로 바로 말하라는 레아의 조언도 있었잖아. …. 그렇지만 평화로운 샤밧의 오후 시간에 다시 전화해 물을 달라고 부탁하기는 좀 많이 미안하다. 참자. 오늘은 좀 목마른 채로 자지 뭐….
“어서 내일 아침이 왔으면 좋겠어.”
바람 소리에 맞춰 발가락을 꿈틀거려 본다.
“내일 아침에 상점 문 열면 뭐 살까?”
“허머스.”
“햄.”
“빵도 사야지. 당연히.”
“아, 피클!”
“피클은 통이 너무 크지 않아? 그걸 어떻게 다 먹어.”
“S, 너는 내가 피클을 얼마나 좋아하는 지 아직도 몰라? 샌드위치 만들고 남은 거는 그 자리에서 내가 다 먹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국물까지 다 마실거야."
"그래라. 피클 돼지야.”
"신난다. 어서 내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설렌다."
내일 아침이면, 꿈이 이루어질 거야. 많이 먹는 꿈….
*샤밧: 유대교에서 지키는 1주 가운데 제7일(토요일). 금요일 해 질 녘부터 토요일 해 질 녘까지다. 이스라엘에서는 주말이 토일 대신 금토라고 생각하면 된다. 샤밧에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상점도 열지 않고, 대중교통도 다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