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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Mar 25. 2021

빌어먹는 여행의 시작

허머스, 바다, 그리고 사막: 이스라엘 내셔널 트레일 1,000km 2

우리는 함께 사막을 걸었어: 이스라엘 내셔널 트레일 1,000km (1)

우리는 함께 사막을 걸었어 (1): 이스라엘을 걸었다, 그가 기절했다. 



“차 마시는 거 좋아해?”      


차? 응…. 응, 좋아해. 차에 대한 호불호를 묻는 질문이 아닐 테다. 차를 끓일 건데 마시겠냐는 질문이다. 잠잘 방을 내어준 사람에게 차까지 얻어 마시는 건 좀 염치없지만…. ‘무례하게 굴어달라’고 특별히 부탁까지 했으니 마셔야겠지….      


“내가 요새 아로마 오일에 꽂혀있거든. 아로마 오일을 만드는 데야 많지만, 음용할 수 있는 오일을 만드는 데는 이 회사밖에 없어. 나는 차에 조금 넣어서 마시는데, 너희도 오일 넣어볼래?”      

거절하지 않는다. 꿀 조금과 아로마 오일을 넣은 레몬그라스 티. 향기롭고 독특하다. 


이스라엘 내셔널 트레일의 시작, '단' 마을


이스라엘 내셔널 트레일 트레킹 첫 날. 마을 구석 어딘가에서 누구에게 들키지 않을까 마음 졸여가며 야영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저녁식사는 마른 빵 따위로 대충 때울 줄 알았는데. 따뜻한 샤워를 한 후 아늑한 부엌에서 아로마 오일을 넣은 향긋한 차를 마시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의 운명을 알지 못했던 오늘 아침, D와 나는 얼마나 불안했던가? 트레일이 이스라엘 북부의 단(Dan)이라는 마을에서 시작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정보가 없었으니 말이다. 마을에 숙소는 있는지, 숙소가 없다면 야영장은 있는지, 야영장이 없다면 노지캠핑은 가능한지 등….      


- 우리 집에 와서 자도 돼.      


우리의 불안은 레아의 문자 한 통으로 잠식되었다. 단에 사는 레아의 연락처를 찾은 건 이스라엘 네셔널 트레일 홈페이지에서였다. 홈페이지에는 트레커들을 돕는, 각각의 마을에 사는 트레일 엔젤(Trail angel)들의 리스트가 있다. 트레일 엔젤은 트레일을 걷는 트레커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이다. 무슨 단체나 조직 같은 건 아니고 그냥 개인들의 리스트다. 리스트에는 엔젤의 이름과 연락처, 제공 가능한 것들이 정리되어 있다. 잠자리만 제공 가능, 잠자리와 식사 제공 가능, 마당에서 텐트만 칠 수 있음, 가정집이 아닌 마당임, 따뜻한 샤워 가능, 세탁기 사용 가능, 집에 개가 두 마리 있음, 와인과 재미도 제공함 등…. 그런 제공 걸해서 엔젤들이 얻는 게 뭐냐고? 모르지. 차차 알게 되겠지. 

이스라엘 내셔널 트레일. 오른쪽 바위에 그려진 삼색 줄이 트레일 표시이다. 

레아의 리스트에는 ‘숙박 제공 가능. 집이 다 찼을 경우 마을 스포츠 센터에서 숙박 가능. 문자 연락만 가능’이라고 쓰여 있었다. 트레킹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엔젤의 도움을 받는 게 염치없게 느껴져서 야영지를 찾으려고 했지만 인터넷만으로는 정보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레아에게 문자를 보냈다.      


- 이스라엘 트레일 트레커인데, 오늘 잘 곳을 찾고 있어. 스포츠 센터에서 잘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면 집 마당이나 마을 공터 같은 데서 텐트를 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 우리 집에 와서 자도 돼. 오늘 방이 비어서 스포츠센터 안 가도 되거든. 몇 시쯤 도착해?


사실 우리는 방보다는 스포츠센터를 원했다. 생전 처음 본 이의 집에서 잔다는 게 조심스럽기도, 미안하기도, 어색하기도 하니까. 예루살렘에서 단까지는 버스로 4시간이 걸렸다. 해가 서서히 저무는 저녁 7시 무렵, 단에 도착했다. 레아에게 문자를 보냈다.    

  

- 단에 도착했어. 주소를 보내주실 수 있을까? 

- 마을 옆 버스 정류장에 내린거지? 차로 데리러 갈게. 

- 아니야. 근처까지 가는 버스가 있는 것 같아. 주소 주면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아.

- 차로 5분이면 가. 조금만 기다려.      


최소한의 도움만 받으려고 했는데. 일이 점점 커지고 있다.


로니를 기다리던 도로

“안녕! 나 레아야. 연락한 S랑 D, 맞지?”      


빨간 소형 차 안에서 레아가 고개를 내밀었다. 반쪽은 삭발하고 반쪽은 끈으로 질끈 묶은 머리. 민소매 티 아래로 보이는 길고 복잡한 문신. 그녀의 차를 타고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깜깜한 단의 도로를 가로질렀다. 레아의 패션 스타일로 판단하건데 알록달록한 그래피티가 어지럽게 그려진 트레일러 같은 곳으로 우리를 안내할 줄 알았건만…. 화초와 꽃이 가득한 마당 앞에 차가 섰다. 문틈으로 따뜻한 느낌의 조명이 새어나왔다. 





“들어와. 방 보여줄게.” 

“마당에서 텐트 치고 자도 되는데.”

“무슨 소리야. 방이 비어있는데 왜 밖에서 자? 고생스럽게.”      


그거야 우리가 방에서 자면 청소도 해야하고…. 여러모로 네가 불편해지니까…. 방문을 열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공간 한 쪽에 침대가 놓여있다. 돈이나 수고로움 같은 걸 대가로 주지 않고 이런 서비스(?)를 제공받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게다가 10분 전 생전 처음 만난 이에게 이런 도움을 받는 게 이해도 잘 되지 않아서, 조금 어리둥절하다.       


“피곤할 텐데 뜨거운 물로 샤워해!”      


방 한 구석에 서서 쭈뼛대고 있는데 레아가 외쳤다. 도움받기와 방해하기를 최소화하자는 전략은…. 오늘은 일단 집어 치워야겠다.      


“특별히 안 먹는 거 있어? 채식을 한다거나.”      


저녁까지 주려나보다. 아니, 없어. 안 먹는 거 없어. 칡뿌리를 생으로 준다고 해도, 고무줄로 파스타를 해 준다고 해도 달게 먹을게. 레아가 저녁을 준비하는 걸 구경하며 아로마 오일 차를 마셨다. 차가 향긋하다. 차도 맛있고 몸도 편한데, 마음이 불편하다. 생판 처음 보는 낯선 이가 베푸는 너무 큰 친절과 호의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내가 이런데 태생이 예민한 D는 오죽할까. 



마을 적당한 곳에서 이렇게 텐트나 치려 했는데, 아늑한 방을 구해버렸다.



이스라엘을 걷기 위한 팁, '무례하라' 


“내가 이스라엘을 걷기 위한 팁을 하나 알려줄까?”

아보카도 껍질을 까며 레아가 말했다.


“이스라엘 사람들, 좀 무례하거든? 나도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아, 그래?”

“무슨 말이냐면…. 뭐랄까…. 사람들이 좀 직설적이야. 어떻게 보면 솔직한 거지만 어떻게 보면 무례한거지. 상황에 따라 그게 긍정적일 때도 있고 부정적일 때도 있는데…. 어쨌든 내 팁은, 너희도 무례해지라는거야. 그게 무슨 말이냐면…. 미안한 마음에, 혹은 예의를 차리려는 마음에 필요한데도 거절하거나 그러지 말라는 거야. 이스라엘 사람들은 돌려서 말하지 않아.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애초에 베풀지도 않는다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호의를 베풀면 받고, 필요한 게 있으면 빙빙 돌리지 말고 직접적으로 다 말해. 그게 여기 방식이야.”      


그게 어디 그렇게 되나. 필요한 건 돈 주고 사는 일에 익숙한 우리인데. 온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데. 필요하면 부탁하고 베풀면 덥석 받으라니.      


“레아 너는 엔젤 활동 왜 하는 거야? 이스라엘 내셔널 트레일을 걸어었어? 그래서 하나?”

“아니. 나 이 트레일 걸어본 적 없어. 이런 트레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애를 낳고 나서 알았어. 그 뒤로 20년 동안 쭉 엄마로 살았기 때문에…. 못 해봤지.” 

“아이가 있어? 아니, 20년이면 애도 아니겠네. 그럼 애가 스무살이야?”

“첫째 딸은 스물한 살이라 군대에 가 있고, 그 아래 애들은 열여섯이야.”

“진짜? …. 전혀 몰랐어. 엄마일 줄은….”

“그래?”

“전혀 그렇게 안 보여서. 물론 엄마란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좀 자유로워 보여서.” 

“자유롭게 살기는 해. 여행도 자주 자고. 딸이랑 가기도 하고, 가족 전체가 가기고 하고, 혼자 가기도 하고.... 작년에는 가족들이랑 베트남 여행을 갔는데, 진짜 너무 좋더라”


맞아, 베트남 정말 좋지. D가 맞장구를 쳤다. 베트남의 북부에서 남부까지, 쌀국수에서 짜조까지. 여행을 좋아하는 세 사람이 만나 여행 이야기를 하니 시간이 꿀처럼 달고 부드럽게 흐른다. 아, 트레킹이 끝나면 이스라엘 남쪽에서 이집트로 넘어가서, 시나이 지역을 여행해 봐. 아름답고, 물가 저렴하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천국이야 거긴. 여행 얘기가 이어지는 동안 채소가 수북이 썰렸다.     

 

저녁식사에는 레아의 아이들이 함께했다. 레아의 남편은 집으로 오는 중이다.     


“지금 자기 집에 있거든. 나랑 남편은 따로 살아. 따로 산 지 이제 2주 됐나….”

“그래? 왜?”

“음…. 어느 순간 그냥…. 부부라고 꼭 같은 집에 살아야 하나? 그건 강박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결혼을 했기 때문에, 남편이기 때문에 함께 있고 싶지 않다는 생각…. 그런 의무적인 관계이고 싶지 않은…. 이해가 가? 함께 있고 싶을 때 함께하기를 선택하고 싶은….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음….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아. 우리도 결혼한 지 10년 쯤 됐거든. 아마 신혼 때 들었다면 이해 못했을 것 같아.” 

“남편이랑 따로 살기로 했다고 하면 다들 걱정스럽게 물어봐. 둘이 무슨 문제 있냐고. 근데 정말 그런 건 아니야. 우리는 좋은 친구야. 대화도 정말 잘 통하고.”

“오히려 관계가 흔들거릴 때는 절대 못할 선택일 것 같기는 하네. 물리적으로 멀어지면 심리적으로 더 멀어지는 건 시간 문제니까….”  

“이 방식이 나랑 안 맞을 수도 있겠지. 다시 함께 살고 싶을 수도 있겠고. 그러면 뭐 그 때 다시 돌아가면 돼.”      

나랑 D도 몇 개월 간 나는 한국, D는 미국에 머물며 떨어져 산 적이 있다. 근데 한 도시에 살면서 일부러 떨어져 사는 선택을 한다면…. 딱히 서로가 필요 없다는 걸 깨닫고 서서히 이혼의 단계로 접어들지 않을까…? 그게 무서워서 레아 같은 선택은 못할 것 같다. 레아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레아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대인배가 아닌 것도 잘 알겠다.     


샐러드와 파스타, 키셰, 닭고기가 상에 올라왔다.   

   

“원래 요리는 남편이 담당했어. 지금은 나도 요리를 해야 한다는 게 따로 살림을 하는 삶의 유일한 단점이. 이거 봐. 너희랑 얘기하면서 무려 세 시간 동안 요리를 했는데 결과물이 고작 이거라니….”       

고작 이거? 빵 조각이나 대충 먹고 자려했던 우리에게는 호사스러운 식탁이다.      

“맛있는 맥주는 죄다 아빠 집에 있는 것도 문제잖아.”

조금 전 식탁에 합류한 레아의 아들이 말했다.      


“맞아…. 내가 남편 집에다 홈바를 만들었거든. 그래서 좋은 와인이랑 괜찮은 맥주는 죄다 거기 있어. 오늘 너희들 올 줄 알았으면 좀 가져오는건데. 아쉽다…. 맛있는 와인 한 잔 따라주고 싶은데.” 

    

대신 차가운 맥주 한 병이 상 위에 올라왔다. 지금 나랑 D가 맛있는 와인 못 마시게 되었다고 슬퍼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물도 못 마시고 갈증에 고통스러워하며 자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맥주까지 곁들인 호사스러운 식사를 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배불리 먹고, 뒤늦게 찾아온 레아의 남편이 따라 준 복숭아주까지 한 잔 마시고, 이스라엘의 지형과 트레킹 팁에 대한 방대한 정보도 두둑이 듣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D와 나란히 누웠다.  

    

"이 트레킹, 시작하길 잘 한 것 같아. 걱정 많이 했는데."

D가 말했다. 

"뭘 걱정했는데?"

"음…. 뭐, 사람들?" 

"맞아 나도.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좀 있었지. 내가 만난 몇 명의 사람들, 그들에 대해 건너 들은 이미지, 국제적인 이미지.... 뭐 그런 거 때문에."

"백지 상태로 걷자." 

"응. …. 그리고 레아 말처럼 해보자. 무례하고 뻔뻔하게.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받자." 

"음. 그건 난 안될 거 같은데." 

"어, 그래. D 너는 성격상 그건 안되겠다." 

"뻔뻔하게까지는 못해도…. 도움은 받을 수밖에 없겠지. 트레킹 여행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아. 우리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뭔가가 있어." 


어쨌든. 해보자. 열심히 걷고, 열심히 빌어먹는 여행을.  



우리는 함께 사막을 걸었어 (3): 이스라엘을 걷다 먹는 허머스의 맛



한 번 해보자. 열심히 걷고 빌어먹는 여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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