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네거티브훈련과 재테크 실패

성공만을 보여주는 세상

by 복덩이

난 사진을 못 찍는 똥손이다. 5등신도 3등신으로 만드는 마법의 손을 가지고 있다. 음식을 하더라도 담음새 있게 배치한다던가,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 '있어 보이게' 하는 데는 정말 재주가 없다. 가끔은 한 번씩 그런 것이 필요할 때도 있을 만도 한데 오히려 가지고 있는 것도 '그저 그렇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아참, 그래서 좋은 점도 있다. 백반집에 가면, 화려한 가짓수의 반찬보다 갓 지은 고슬고슬하면서도 윤기 나는 구수한 밥을 제일 중요시 여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도 그 사람의 진득하면서도 단단한 여정에서 나오는 깊은 내음에 끌린다. 감사한 것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운이 좋아 항상 좋은 분들을 만났다. '적재적소'라는 말이 적절하겠다. 인생의 여러 크고 작은 난관이 있을 때마다 적재적소에 생면부지의 좋은 분들을 만나 난관을 해결할 힘을 얻고 해결할 열쇠를 찾을 수 있었다.


'카사독', '따독따독' 이름부터 좋다. 퐁퐁이 운영하는 '카페를 사랑하는 독서모임'에 있으면서 아기자기한 카페에서 모락모락 우리들의 이야기를 피워내었으며, 그녀가 꿈을 찾아 떠난 뒤에도 거기에 용기를 얻어 다른 분이 하던 것을 이어받아 '따독따독'이라는 새 이름으로 독서모임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배운 것들을 어설프게 따라 하려다 B형 남자가 내밀었던 500만 원을 잃었다. 나의 재테크 시작의 기고만장은 이런 것과 같았다. 아빠가 통닭 사줄 테니 공부해서 판검사정도는 되야지라던 말씀에 닭 목뼈를 쥐고 응당 고개를 끄덕이던 어린 시절의 나, 도깨비방망이처럼 무엇이든 손대기만 하면 '뚝딱' 만들어질 것이라는 필연적 행복의 당위성처럼 부모님을 위해 돈을 벌고 싶었고 그 선한 의도(?)에 당연히 결과도 따라올 줄 알았다.

처음 독서 모임을 할 때 여러 사람들이 일회적으로 찾아왔다. 사람은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학교에 가는 이유가 어떤 이는 집이 답답해서이고, 어떤 이는 갈 데가 없어서 이고, 간혹 공부가 재미있는 아이도 있을 것이며 또 식단표에 좋아하는 반찬 동그라미 치며 점심시간에 와다닥 달려가는 설렘 그 하나인 사람도 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깨달은 가장 큰 착각은 나만 '진실'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나만의 안경 너머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이 나무이고 풀이고 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의 안경을 가지고 있었고 누구는 그것을 세모와 네모, 동그라미로 보았고, 누구는 2X2, 혹은 1/n으로 보았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한 꿀팁 공유' 라든가. '인맥 확보' 혹은 ' 자기 계발서'위주로 편향된 책을 읽는다는 것에 불편한 기색을 내보였다. 하지만, 정작 부모님이 아프시고 미래가 걱정되니 현실 앞에서 돈이 곧, 책임의 무게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독서'를 통해 마음의 안정과 여유를 찾는 것과 같이 현실에서 도움이 되는 한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내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책임의 무게에 따라 부과된 '조건'중 하나라는 것을 곱씹으며 내 삶의 방향성의 깃발을 잊지 않고 되새기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다시 돌아가서, 나는 도대체 돈을 어떻게 날려 먹게 된 것일까? 복직은 이미 물 건너갔고, 다른 업무를 겸임하기는 힘들고 육아로 묶인 상태에서 선택한 것은 '가상화폐 선물 거래' '주식투자'였다. 여기서 '선택'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온 삶의 방식이 있다. 즉, 재테크도 그러한 삶의 방식에 따라 이루어졌다면 크게 흔들리지 않고 갈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때는 '흐르는 대로 선택됨'이었던 것 같다.


현재 이 상황이 더 나아지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으며, 마음이 약해진 상태에서 목적성을 가지고 온 사람의 말을 무시하기 힘들었다.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냐는 주위에서 들어 본 그런 엇비슷한 것이라 생략하겠다. 왜 그랬냐고 묻는다면, 황당하겠지만 '눈빛이 선해서' 그냥 믿어도 될 것 같았다. 다음으로, 주식은 어쩌다 그렇게 되었냐고 묻는다면, 텐버거의 법칙이 적용될 것이라는 오아시스 같은 신기루를 믿어서 동전주를 샀다는 정도.


턱걸이에서 중요한 훈련 중 하나가 네거티브 훈련이다. 즉, 올라가기 위해서는 턱을 걸치고 팔을 굽혀 매달린 상태에서 최대한 버티면서 천천히 내려올 수 있어야 한다. 악력을 키워 팔을 모두 핀 상태에서 매달리는 것이 이루어졌다면 턱걸이 훈련 2.0 버전으로 턱을 걸친 상태에서 아등바등 또 시작해야 한다.


왜 사람들은 모두 성공의 이야기만 할까? 가끔 이런 게 궁금하다. 눈빛은 흔들리면서 왜 행복하다고 이야기할까. 실패했다. 그러나 당장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때의 실패를 천천히 메꾸어 나가고 있다고 그마저도 삶이라고 이야기해 주지 않았을까? 넘어지고 난 뒤에 반드시 오뚝 일어서서 더욱 당당하게 나아가야 하는가. 올라가기 위해서는 때로는 내려가는 법도 배워야 하며 로켓처럼 순식간에 하늘을 비상하는 법칙이나 기적 따위는 없다고 그게 보편적 삶이라는 것을 당당하게 알려주지 않을까?


여기서 다시 한번 B형 남자가 등장한다. 물론, 시작에 앞서 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말이 '없어도 되는 돈'이라고 했지만, 그걸 진심으로 말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서로 알게 된 이래로 이렇게 풀처럼 더 빨리 눕고, 깊게 조아렸던 적이 있었나 싶다. 하지만 다행히(?) 쫓겨나지 않았고, 독서모임 나가는 것도 허(?) 해 주었다. 나머지 뒷수습은 계산기 두드리며 통신요금 절감, 헬스장 정기권 포기, 대청소에 대청소를 거듭해서 돈 되는 거 팔고 또 팔기, 안 그래도 사람 안 만나는데 근신 더하기 근신. 여차저차 꽃을 간직한 소녀는 꽃세상 말고 도형과 숫자로 이루어진 세상의 안경도 써보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삶이 맞는 것인지 스스로 질문을 가져보게 되었다. 그 흔들림의 시작이 어디였는지 모르겠다. 난 흔들렸기에 이렇게 된 것일까? 내 상황이 나를 흔들어서 이렇게 된 것이었을까? 그리고 병간호, 입원, 사기, 복직무산 이 흔들림 앞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아니 내 여태껏 살아온 삶의 방식으로 내려가는 모습마저도 연습이라 생각하고 다시, 한 걸음 내딛기 위해 오랜만에 책상에 앉게 된 것이다.


내가 받은 유산은 성실과 건강이었고,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선언하고 싶은 그 가치들을 부모님 그리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올라가지 못하고 내려가는 것도 훈련이다. 다만, 내려가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 하나라도 끝까지 찾아서 버티고 버티다가 그렇게 내려가고 싶었다. 결말이 정해졌다는 것도 알지만, 난 그 수많은 내려감 속에서 그 내려감마저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되새기고 증명하고 있다. 내가 지금 있는 이 자리가, 서랍 속 오래 겨울잠 자고 있던 턱걸이 밴드를 다시 꺼내며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내 마음속 가장 음침한 공간에 있는 화장실을 문을 열고 그것을 쓸고 닦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결핍과 모순, 상처들을 마주하며 입학식을 앞두고 견출지에 내 이름을 선명하게 새겨 교과서에 붙이던 그 마음으로 정성스레 그것들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도장 깨기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시작이며, 이 글을 읽는 그대와 내가 마주하고 맞닿아 있게 된 연유이다.

keyword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