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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병한 Jun 13. 2019

기생충

봉준호와 계급 갈등

<기생충>을 두고 말이 많다. 영화에 드러나는 상징에 대한 해석에서부터 가난을 전시하는 영화라는 평까지 각자의 관점으로 수많은 글이 쏟아지고 있다. 나는 고민했다. <기생충>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봉준호 필모그래피를 바탕으로 읽는 게 좋겠다. 이유는 없다. 내 글이니까 내 마음대로 쓰는 거다.




봉준호 필모그래피


봉준호 감독은 사회 계급, 계층의 문제를 상징적으로 영화에 드러내곤 했다. <괴물>, <설국열차>, <옥자>가 모두 그런 영화다.


<괴물>


 <괴물>은 괴물에 맞서는 약자들의 영화다. 어린 소녀가 괴물에게 붙잡혀 갔고,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지만 국가 권력은 소녀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인 소녀의 가족이 나서자 국가 권력은 오히려 그들을 방해한다. 놀랍지 않은가? <괴물>은 놀라운 교훈을 알려준다. 우선 강한 힘을 얻고 나면 약자가 어려움에 처하거나 부당하게 착취당하고 있을 때, 약자를 구하기 위해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에게 힘을 사용하는 편이 좋다. 약자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짓밟아주면 평화가 찾아올 테니까.


<설국열차>


<설국열차>는 자본가들의 변명을 말한다. 열차의 꼬리칸 탑승자들은 최초에 무임승차를 한 사람들이다. 열차밖에 있었다면 모두 죽었을 것이므로 열차에 태워준 것은 목숨을 구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으므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돼지우리 같은 꼬리칸에 태워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단백질 블록을 먹으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 변명이 옳은 것인가? 여러 의문이 생긴다. 사실 열차 바깥에는 생명체가 살고 있었다.


<옥자>


<옥자>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의 알레고리다. 미자는 옥자를 구하기 위해 거대 그룹 미란도 코퍼레이션과 맞선다. 거대 그룹이라는 시스템을 장악한 사이코패스 CEO는 너무도 간편하게 개인을 착취한다. 부당한 일이다. 문제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성찰 없이 모순된 행동을 하는 개인에 있다. 기업의 CEO는 자신의 전임자를 사이코패스라 부르면서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의 행동을 한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악은 평범한 사람에게서 발견된다.


놀랍게도 이 내용들은 모두 <기생충>에서 집대성되었다.




기생충은 누구인가?


스크롤을 맨 위로 올려 이미지를 보자. 반지하의 집이다. 한 가족이 식사를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벽지는 낡아 여기저기 곰팡이가 슬어 있다. 지저분한 주방은 저기서 밥을 잘못 먹었다가는 바로 장염에 걸릴 것이라는 경고 메시지를 날리고 있다. 누가 봐도 기생충이 살만한 공간이다.


실제로 그들은 부잣집에 기생하는 듯하다. 아들은 영어 선생님으로, 딸은 미술 선생님으로 학력을 위조하여 과외 선생님이 되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성실히 일하던 전임자를 음모를 꾸며 내쫓고 각각 운전기사와 가정부로 일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기생충이 원래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존재였나?


<기생충> 포스터

가만히 보니 기생충은 서 있고 숙주는 누워있다. 어쩌면 기생충이 숙주이고, 숙주가 기생충 일지 모른다. 시야를 조금 넓혀 생각해보자. 반지하집의 가족은 왜 부잣집에 들어가서 일하고자 했을까? 돈을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자리를 얻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그런데 부잣집은 어떻게 그 돈을 모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박동익이 글로벌 IT기업 CEO이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의 소유주다.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박사장은 자신이 일한 것보다 더 많은 보상을 쉽게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박사장이 자신이 일한 것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는 동안 자신이 일한 것보다 적은 보상을 받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생산수단의 소유주가 쉽게 부유해지는 것처럼 그들은 쉽게 가난해진다. 이제 슬슬 감이 오기 시작한다. 기생충은 반지하집이 아니라 부잣집이다.


박사장은 '선' 페티시에 빠져있는 듯하다. 피고용인이 '선'을 지키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고, '선'을 넘으면 질색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박사장이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피고용인의 노동력이지 인권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대한의 자유 보장은 사람의 인권을 돈으로 사는 것마저 정당화하려 하지만 정작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지켜야 할 선'이다. 특정 개인에 대한 과도한 자유의 보장은 그 대척점에 서 있는 평등의 가치를 짓밟는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처음에 기생충으로 보였던 반지하집의 사람들이 갑자기 선량한 어린양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비판의 소지가 있다. 그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는 것을 당연시한다. 일자리부터 목숨까지 필요한 상황에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냉철하게 빼앗아버린다. "행복은 나눌수록 커지잖아요"라는 말은 모순처럼 들린다. 개인은 타인을 속이는 왜곡된 욕망을 추구할 때 이처럼 모순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악함'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의 삶 속 곳곳에 위치한다.


기생충은 이렇게 다양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단순히 "부잣집과 가난한 집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라는 상상력에서 출발한 영화라고 하지만 이 영화는 사실 계급 갈등을 다룬 봉준호 필모그래피의 집대성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자 그러면 이제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기생충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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