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와 계급 갈등
<옥자>는 소녀가 슈퍼돼지를 빼앗겼다가 찾는 이야기다. 스포일러고 뭐고 할 것도 없다.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전개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만큼 서사가 밋밋하다. 그러나 밋밋한 서사와 품질이 낮은 서사는 다르다. 밋밋한 서사가 품질이 낮은 서사가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더 필요하다. 이를테면 영화의 연출적인 면에서 하자가 있거나 시사하는 바 없이 신파만 때려박거나. <옥자>는 연출적인 면에서 훌륭하고, 특히 풍부한 시사점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품질이 낮은 서사는 아니다. 밋밋한 서사는 오히려 그러한 점들을 부각한다.
첫 번째 시사점은 강자와 약자의 관계이다. 이 작품에서도 마르크스주의는 여실히 드러난다. 계급 갈등,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시스템과 개인. <옥자>에서 생산수단은 거대 기업이라는 시스템이다. 시스템을 장악한 기업의 우두머리는 그렇지 못한 개인을 간편하게 착취한다. 부당한 일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국적과 인종과 종교를 넘어서서 우리는 모두 개개의 인간입니다. 시스템이라는 굳세고 단단한 벽을 앞에 둔, 하나 하나의 알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벽은 너무나 높고 단단하며, 또한 냉혹합니다. 혹시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이길 가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그리고 서로의 영혼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는 걸 믿고 그 온기를 한데 모으는 데서 생겨날 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실감할 수 있는 살아 숨쉬는 영혼이 있습니다. 시스템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시스템이 우리를 이용하게 놔둬선 안 됩니다. 시스템이 홀로 작동하게 놔둬선 안 됩니다. 시스템이 우리를 만든 게 아닙니다. 우리가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는 개개의 인간을 '하나 하나의 알'에, 시스템을 '굳세고 단단한 벽'에 비유한다. 비유를 인지하는 즉시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그렇다. 개개의 인간은 시스템을 이길 수 없다. 미자가 옥자를 구하기 위해 미란도 그룹에 저항하는 것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미자가 백숙은 먹으면서 돼지를 구하러 목숨을 거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미자는 동물권을 주장하는 운동가가 아니다. 슈퍼돼지 옥자와 유대감을 형성한 조그만 소녀일 뿐이다. 소녀가 되찾고자 하는 것은 슈퍼돼지의 동물권이 아니라 개체와 개체 사이의 따뜻한 정(情)이고 사랑이다. 소녀는 그것을 되찾기 위해 시스템에 저항한다. 계란에는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옥자>의 미자와 미란도 그룹의 관계는 현실에서 너무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의 알레고리다.
두 번째 시사점은 모순이다. 영화에는 많은 모순들이 드러난다. 생명을 보호하고자 하는 조직의 대표가 조직의 전통을 따르지 않은 조직원을 구타한다. 미란도 그룹의 종업원은 그룹의 위기 상황을 초래하고 상황을 즐긴다. 그룹의 총수는 전임 CEO를 사이코패스라 비난하면서 본인도 사이코패스처럼 행동한다. 아이러니한 느낌이 들지만 어딘가 익숙하기도 하다. 현실에 충분히 존재할만한 모순들이 아닌가?
ALF의 대표 제이는 생명을 위해 움직이는 조직의 전통을 중시한다. 미자에게 굳이 자신들의 전통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그 증거다. 케이가 대의를 위해 미자의 말을 오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규칙을 어겼다며 그를 폭행한다. 그에게는 조직의 목표인 생명 중시보다 조직의 전통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때 모순은 ALF 리더가 두 개의 역할이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룹의 리더로는 적절한 행동일지도 모르나, ALF의 조직원으로서 해서는 안될 행동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두 개의 역할이 부여된 상황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모순되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미란도 그룹에 고용된 트럭 운전사는 옥자가 트럭에서 빠져나간 상황에서 더 이상 트럭을 움직이지 않는다. 심지어 뉴스 인터뷰에서 웃으며 "이제 미란도사는 완전히 좆됐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한다. 그는 겉으로는 미란도의 일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반대다. 그의 행동은 사실 상 미란도에 대한 적대 행위다. 진심으로 미란도사가 곤란해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시스템이 개인을 착취하는 상황에서 벌어질 수 있는 합리적인 행동이다.
그룹의 총수 루시 미란도는 아버지와 언니를 모두 사이코패스라 칭한다. 특별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들이 나쁜 일을 했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회사가 영화에 나오는 것과 동일한 '비즈니스'를 계속 해왔다면 납득 가능하다. 모순되는 지점은 그녀의 행동에 있다. 실제로 그룹은 유전자 조작 실험실을 운영하여 고기를 생산한다. 하지만 겉으로는 유전자 조작이 없고 환경 친화적이라 말한다. 전 세계에 유전자 조작 슈퍼 돼지를 보내며 환경친화적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려 하기도 한다. 정신병에 걸리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이지 않은가? 그녀야 말로 진정한 사이코패스다. 개인은 타인을 속이는 왜곡된 욕망을 추구할 때 이처럼 모순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영화는 다양한 모순된 상황을 보여준다. 때로는 자신이 의도가 개입된 상황에서 모순이 드러나기도 하고,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모순이 드러나기도 한다. 트럭 운전사의 경우 겉으로는 모순으로 보이지만 자신의 의도가 개입되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는 합리적인 결정이 될 수 있다. 반면 ALF의 대표, 미란도의 대표는 인지하지 못한 채 모순된 행동을 한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합리적인 행동이 될 수 없다. 또 그 행동을 하게 만드는 개인의 욕망이 타인을 억압하거나 해치는 일이라면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의 끔찍한 행위에 기여한 '아이히만'도 자신에게 부여된 책무를 다한다는 성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당신은 어떤 역할을 가지고 있는가? 모순된 상황에 놓여있지는 않은가? 한 번쯤 성찰이 필요한 시기가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이영미 역,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