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문화 II 잊히는 서민문화 05 한일관

아련해지는 피맛골의 추억 다섯

by Architect Y
종로 피맛골 70년 추억과 맛 그대로 강남으로 옮겨 10년…


제일은행 본점 뒤의 ‘한일관’은 1939년부터 이승만 전 대통령 등 명사들이 드나들던 불고기집이다.

보신각 제야의 종 타종 행사에 온 역대 서울시장들은 이곳에서 저녁을 해결하곤 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매주 한차례 이상 찾았다.

옥호는 1939년 처음 화선옥으로부터 시작되어 대를 이어온 곳이다.

창업주인 고 신우경 할머니가 처음 문을 연 곳은 종로3가였지만 곧 종로1가로 이사했다.

쇠고기 장국밥과 너비아니가 주 메뉴였다.

광복이 되자 한국에서 으뜸가는 식당이라는 뜻으로 韓一館한일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한국전쟁 중엔 부산으로 옮겼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청진동 3층 건물을 세운 것은 1957년이다.

신할머니는 종업원을 가족처럼 여기고, 재료를 아끼지 말자는 두가지 경영철학으로 이곳의 번영을 이끌었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가시고 경제가 활기를 찾아가던 시기인 60년대에 한일관은 전성기를 맞았다.

청진동 한일관

음식값이 비싸 서민들이 찾기 힘든 곳이었지만, 이곳의 독특한 불고기 맛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이곳의 불고기 1인분(200g) 가격은 100원.

3~4인 가족이 배불리 먹으려면 500원가량이 필요했던 셈이다.

당시 회사원들의 월급이 3만원 안팎이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적지않은 돈이다.

때문에 한일관 불고기는 중·고등학교의 졸업·입학식 때, 약혼식이나 결혼식 피로연 등 특별한 때만 먹는 귀한 음식이었다.


하이고.

반찬 참 많네.

한일관 불고기나 한번 배터지게 묵고 죽으면 내사 마 소원이 없겄다.

박보금이 쓴 입맛을 다시면서도 숟가락을 들었다.

다른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상으로 다가앉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

그 밥상만이 아니라 그들이 쓰고 있는 볼품없는 잎숟가락에서도 궁기는 흐르고 있었다.

- 조정래 소설 ‘한강’ 중에서


종로1가 신신백화점 뒤와 광교, 명동에도 분점을 냈다.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은 마이크 시설까지 갖춰놓는 등 최고의 연회장소로도 꼽혔다.

당시 큰 식당으로 우래옥·삼오정·이학 등이 있었으나, 규모 등에서 한일관에 대적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1978년 창업주의 타계 후 딸인 고 길순정씨가 사업을 물려받았지만 서울 곳곳에 ○○가든, ○○회관이라는 이름의 대형 음식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1위 자리를 위협받았다.

분점도 하나둘씩 줄어 97년 길씨가 세상을 떠나고 딸인 김은숙,이숙씨 자매가 경영을 맡으면서 명동분점까지 문을 닫았다.

본점만 남은 한일관은 이 해 4월부터 11월까지 영업을 중지하고 내부를 현대식으로 바꾸는 등 리모델링에 들어갔다.

다시 문을 연 한일관은 전성기를 맞기도 했다.

점심을 먹으러 오는 근처 직장인들도 늘어났다.

국내 정·재계 인사는 물론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會根康弘) 전 일본 총리도 해마다 한일관에 들렀다.

70년 세월 동안 할아버지 손을 잡고 왔던 꼬마가 꼬부랑 할아버지가 돼 손자 손을 잡고 오는 손님도 있을 게다.

음식점은 ‘밥’만 주는 곳이 아니다.

맛도 주고, 힘도 주고, 추억도 준다.

세상살이가 힘들 땐 단 밥이 입에 들어가도 씁쓸한 맛을 낸다.

뜨거운 국밥을 앞에 두고 돌아가신 아버지 거친 손을 떠올리기도 한다.

최루탄 가스로 콧물을 흘리며 갈비탕을 먹었던 사람도 있었겠고, 고시에 붙어 불고기가 올라온 축하의 밥상을 받은 이도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들에게 한일관은 음식점 이상의 장소임에 틀림없다.

한일관 06.jpg

2008년 청진동 재개발에 밀려 종로를 떠났다.

그리고 강남 신사동에 다시 문을 열었다.

성수대교 남단 호산병원 뒤편에 자리 잡은 ‘한일관 압구정점(02-732-3735)’.

화강암으로 지은 5층 건물에서 70년 세월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말쑥한 모습이다.

다행히 음식 맛은 변하지 않았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주방과 홀 서빙 직원 대부분이 고스란히 넘어왔기 때문이란다.

한일관의 대표메뉴인 불고기.

불판 테두리에 양념육수를 붓고, 불판 중앙에 불고기를 얹어 굽는 옛 스타일 그대로다.

짜지 않고 달달하면서 깊은 맛을 낸다.

한일관 10.jpg


이전 12화음식문화 II 잊히는 서민문화 04 청진동 해장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