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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5개월

글로 채우지 못한 공백을 채운 시간

마지막으로 글을 올렸던 날이 2022년 6월 28일 이었다는 기록을 보니, 1년이 훌쩍 넘은 시간 동안 글을 쓰지 못한 공백이 너무 길었음이 실감 났다. 핸드폰 알람에서는 "브런치에 글을 올리지 않은지 OO 지났습니다."라는 소식이 전해졌었고, 내가 좋아하는 관심 작가님들의 새 글이 올라올 때면 언제나 핸드폰에서 울려대던 알람을 듣지 못한 지도 수개월이 지났다. 이유인즉, 핸드폰에 문제가 생겨 새로운 전화기로 바꾸게 되면서, 브런치가 제대로 로그인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매일매일 아침에 눈을 떠 출근을 하고 하루를 채워가는 "일상"을 지내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저 벅찼고, 그렇게 글을 올리지 못하는 죄책감이 사라질 때쯤, 갈증을 느끼듯 글을 쓰고 싶다는 갈망을 느꼈다.


갈망은 간절함이 되어 머릿속에서 수십 번의 시뮬레이션을 그려냈다. 하루의 일정 속에 시간을 쪼개어 글을 쓰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시뮬레이션이 꿈이 되어버린지도 몇 개월이 지나가니 1년 5개월이 지났다.


1년 5개월 동안 우리 여섯 식구는 제일 더웠던 2023년 8월 한국을 3주간 방문했다. 2022년 11월에 발권해 놓은 비행기표는 내 인생의 가장 최고의 선택이라 칭찬받을 만큼, 2023년의 한국행 비행기 값은 하늘로 치솟는 기록을 보여줬다. 2022년 11월 우리 가족 여섯 명의 비행기표로 지불했던 금액이 만불 ($10,000.00 CAD)이었는데, 2023년 8월 한국행 왕복 일인 비행기표 가격이 $3,500.00 ~ $4,000.00이었다면 믿을 수 있을는지...


와이프 놀리는 재미가 쏠쏠한 남편도 이번만큼은 나에게 "잘했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우리 여섯 식구는 뜨겁고 습했으며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던 2023년 8월의 한국을 만끽하며 다시 캐나다의 우리 삶으로 돌아왔다.

캐나다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남편과 나는 직장으로 복귀했으며, 시차 적응의 여유를 일주일 정도 즐기며 새 학기를 준비했던 아이들 네 명도 무사히 2023년 9월 11학년, 9학년, 7학년 그리고 5학년으로 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손주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던 우리 시어머님은 행복해 하셨다. 8년 전, 4살 때 보고 다시 만난 손주는 어느새 12살 청소년이 되어 할머니와 어깨를 나란히 마주하게 커버렸다.

시어머님의 팔순이었던 2023년, 우리가 한국을 방문했던 내내 음식도 잘 못 드시고 누워만 계셨던 시어머님은 우리가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는 소식을 형님을 통해 전해 주셨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던 어머님, 병원을 가지 않겠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시며 버티시더니 아들 내외 그리고 네 명의 손주들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그 고집을 꺾으셨다.

그렇게 병원에 입원하신 어머님은 신장의 기능 저하로 등에 구멍을 내고 신장에 관을 꽂는 시술을 받으셨고, 여러 가지의 검사를 통해 말기암이라는 진단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다.

남편의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다. 입으로 나오는 말들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느껴져, 남편과 나는 힘겨운 말 사이로 나오는 눈물을, 흐느낌을 함께 삼키며 2023년의 9월을 보냈다.


2023년 10월, 친정 엄마의 말기암 소식이 전해졌다. 밤새 전화를 했던 아빠와 남동생의 "missed call" 기록에 불안감을 느끼며 아빠와 통화를 했던 그 새벽, 의사의 진단 소식을 전해 들었던 그날의 아침, 아이들을 위한 네 개의 점심을 만들며 나는 무너져 내렸다. 멀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효를 하며 사는 우리는 2023년 우리가 얼마나 불효자식들인지를 실감하며 뼈에 사무치는 슬픔을 삼켜야 했다.


우리는 안다. 자식이면서 어느새 부모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이기에 우리가 낳은 자식들이 주는 무게를 내려놓을 수 없음을 안다. 쉬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도, 쉬이 떠날 수 없는 우리의 상황도 우리뿐만이 아닌 우리의 형제와 가족이 다 알고 있다. 이해와 배려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핑계를 만들어주는 가족들에게 그저 고마울 뿐이라는 것을 그 누가 모를까?

어느새 40대가 되어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는 나와 어느새 50을 바라보는 남편, 우리는 이제 부모님과의 이별이 가까워짐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슬퍼만 하기에는 시간이 한없이 부족하다. 조금 무리가 되어도, 우리의 자녀들이 눈에 좀 밟혀도, 서로 각자의 어머님과 함께 하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기로 했다.

남편이 한국행 비행기표를 구매했다. 두 달이라는 시간을 다녀오겠다고 한다.

나는 풀타임으로 일을 해야 하고 돌봐야 하는 아이들도 넷이지만, 괜찮다. 이제 다 큰 아이들이 제법 본인들의 몫을 해 주고 있으니, 조금 더 정신없이 두 달을 보내야 하겠지만 남편이 없는 두 달의 시간 동안 우리 다섯은 괜찮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긴다.


지난 1년 5개월.... 글로 채우지 못한 나의 삶은 잊히지 않는 시간들로 채워졌다.

항암 치료를 진행하며 점점 힘이 빠져가는 엄마의 목소리를 매일매일 듣고 있는 이 소중한 순간들을 기록하고 싶다. 캐나다에 온 뒤 21년을 지내며 엄마와 함께 할 수 없었던 시간과 떨어져 있었지만 함께 만들어 갔던 추억을 잊지 않기  위해 끄적끄적 메모처럼 나의 엄마를 기억하고자 한다.

아빠의 가장 친한 친구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 친구분의 손자와 아빠의 손자인 우리 아이들이 함께 했던 단양 여행. 3대에 걸쳐진 우정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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