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이 즐거웠으면, 부디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면 - 프리다. 191쪽
죽음을 앞둔 프리다는 일기에 이런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그녀의 고통스러운 삶을 낱낱이 보고 난 뒤라 마음이 먹먹해진다. 이 세상을 떠나는 길이 즐겁길 바라면서도 다시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고통을 평한다는 것도 우습지만 프리다의 삶은 고통스럽다는 영역을 뛰어 넘어 버리는 것이라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그녀는 열여덟 살 때 ‘척추가 부러지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심한 부상’을 입는 전차 밑에 깔리는 교통사고를 당한다. 당시 잃어버린 조그마한 장난감 양산을 찾으러 버스에서 내리지 않았더라면 하는 가정도 무색할 정도로 그녀가 당한 교통사고 앞에서 내가 더 절망할 정도였다. 이 사고 이후 그녀는 죽기 전까지 서른두 차례나 수술을 받아야 했는데, ‘삶이 바로 그림이었으며, 그림이 바로 삶’이어서 버틸 수 있었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권위와 판에 박힌 생각을 비웃는 프리다의 정신은 훗날 그녀의 작품에 고스란히 옮겨져 새로운 모습의 회화로 탄생합니다. 38쪽
죽음의 고비를 넘겼기에, 그리고 죽음은 항상 그녀의 곁에 있었기에 ‘권위’, ‘판에 박힌 생각’ 같은 건 할 틈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그녀의 그림을 봐도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적나라하고 과감하게 정면으로 맞선 느낌이 들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 전차에 깔리는 사고도, 죽음이 늘 함께 있는 모습도, 남편 디에고가 상처 줄 때도 보는 사람이 다 아플 정도로 내면의 고통을 드러낸다. ‘가슴 에는 고통을 이처럼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은 그 고통을 쫓아내기 위한 프리다의 몸부림이었’다고 말하고 있기에 그녀의 몸부림을 보는 일이 조금은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렇게나마 고통을 쫓아낼 수 있다면, 꼭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했다.
프리다가 남긴 자화상은 자신의 외로움과 절망, 마음의 상처를 보여 주는 거울입니다. 화가는 자신의 모습을 결코 미화해서 그리지 않았으며, 감정 상태를 표현하는 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자화상을 그릴 때 빠지기 쉬운 자기도취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153쪽
그녀의 자화상을 한 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았던 게 이런 이유 때문이었나 보다. 그러니 그녀의 그림을 본다는 건 그녀의 마음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이라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피하고 싶은 생각 없이 자꾸 마주하게 되는 것은 보는 행위로 마치 나의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 같았다. 그림이 그녀의 삶 자체라 타인의 삶을 마주한다는 게 이렇게 엄청난 일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타인의 삶에 함부로 끼어들 수도 없고, 쉽게 왈가왈부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저 그녀의 바람처럼 외출이 즐겁길 바랐고, 이 책의 제목을 그제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는 고통으로 그린 그림들이 스스로에게 희망이 되었듯 누군가에게도 희망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참 감격스럽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