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하튼 우리는 그 무엇에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by 안녕반짝
P20130802_095055691_1C568199-8458-4308-83E5-0B19403DCCBA.jpg


바로 눈앞의 사물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의 짙은 안개를 경험한 적이 있다.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경험한 터라 안개를 떠올릴 때면 그때의 공포가 엄습한다. 안개는 시야만 가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혼탁하게 만들어 불안감을 조성하고 무슨 일이 꼭 일어날 것 같은 복선을 까는 존재다. 이 소설의 초반에 등장하는 안개는 나의 예감을 적중했고 표지만큼이나 쓸쓸하고 고독한 소설이라는 사실을 다시 곱씹게 되었다. 그러나 고독함 이면에는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운 문체가 등장한다. 사람마저 말라버릴 것 같은 쓸쓸함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을 하면서도 토머스 셰퍼드란 인물의 고독 속으로 침잠하는 기분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보니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쁘다가도 눈을 감을 때까지 걱정을 놓지 못하는 응어리를 내 놓은 기분이 든다. 만약 그렇게 소중하고 귀한 아이를 나의 실수로 잃어버린다면 나는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정신을 놔버리거나 내 안으로 갇혀버리고 말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톰(토머스 셰퍼드)은 자신의 실수로 아이를 잃었다. 거친 바다로 나갔다 아이를 잃었고 과실치사로 5년을 복역했다. 출소 후 당연하단 듯이 자신이 떠나본 적도 없고 아이를 잃었던 고향으로 돌아온다. 누구하나 달갑게 받아주지 않은 고향은 이내 들썩이고 그로인해 용서를 비롯한 삶의 희망, 죄책감 등 묵직한 주제들이 톰을 관통한다.


여하튼 우리는 그 무엇에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를 더욱 강하고 옭아매는 것은 뿌리 깊이 박힌 우리 본연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우리의 과거이다. 31쪽


이 문장만 보더라도 톰 앞에 놓인 과거의 실수가 그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할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다시 돌아온 고향. 과연 그는 그곳에서 용서 받을 수 있으며(누구에게 용서를 받아야 하는 걸까? 동네 사람들? 죽어버린 아이? 아니면 자신?) 새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결코 녹록하지 않은 시선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고 그 모든 고통을 또다시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의 잣대에서 심판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는 볼 수 없었다. 자신의 과거를 모두 알고 있는 고향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고 맞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돌아왔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아이가 아니었을 아이. 어쨌거나 이미 벌어져 버린 일을 되돌릴 수 없기에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채워가야 했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에게도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쯤이면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톰은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함께 복역했던 동료였고 톰은 그와 함께 새롭게 출발하려 했다.


드라마〈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차관우란 변호사가 그런 말을 한다. 살인자인 민준국과 피해자인 박수하가 다른 점은 자신을 믿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민준국은 그렇게 짐승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말이 가슴에 들어온 이유는 나의 이야기만 하려고 하지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들으려 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고향으로 돌아온 톰에게 다행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말로 풀어도 상처가 치유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면서도 과거의 모든 것을 잃어야했던 톰. 고통스럽지만 그는 그 과정을 잘 견뎠고 피하지 않고 맞섰다. 그렇기에 새롭게 시작할 용기를 얻을 수 있었고 과감히 행동에 옮겼다. 남들이 말하는 평범한 길을 갈 수도 있었을 그였지만 자신의 마음이 가는 데로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모습에 한없는 응원을 해주고 싶다.



keyword
안녕반짝 교육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구독자 1,698
이전 07화너를 낳아준 사람이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너 자신뿐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