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무소유>
양손가득 무소유를 한 꾸러미씩 들고 서점을 나오면서도 참으로 기분이 이상했다. 절판된 <무소유>를 한껏 소유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어제 이 책을 발견하고 오늘 이렇게 사들고 나선다는 사실에 기시감까지 느껴졌다. 근교의 언니 네에 온 김에 도스또예프스끼 보급판이 있을까 하고 서점에 들렀었다. 결국 원하던 책을 발견하지 못하고, 엉뚱한 책만 사들고 나오다 카운터에 쌓여 있는 <무소유> 양장본과 문고본을 발견했다. 의아해서 새로 출간됐냐고 묻자 그렇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게 서점을 나와서도 이상해 <무소유>의 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지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무소유>가 출간됐다고, 서점에 쌓여 있는 걸 봤다고, 이제 구입하면 되겠다고.
그러나 지인의 반응은 뜨악했다. 지금 장난 하냐고, 온라인 서점에도 없고, 일반서점에도 없는 <무소유>를 어디서 봤냐는 답장과 함께 책이 있으면 당장 구입해 달라고 했다. 이미 버스를 타고 언니 네를 향하고 있었고, 서점도 문 닫을 시간이라 분명 <무소유>를 봤다고 하소연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믿는 눈치가 아니라 서점에 전화해서 재고가 넉넉히 있는지, 내일 몇 시에 문여는 지까지 물어보았다. 서점 주인은 책이 넉넉히 있으니 아무 때나 천천히 오라는 답변을 해주었다. 그럼에도 지인은 오후까지 책이 남아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냐고 다그쳐대 할 수 없이 아침 일찍 서점에 가 양장본 6권, 문고본 5권을 구입했다. 6만원이 훌쩍 넘는 책 가격을 보면서 '이건 법정 스님의 뜻이 아니야!'란 생각을 하면서도 손에 쥐어진 책을 보며 흡족해 하던 찰나, 갑자기 이런 심부름을 시킨 지인에 주눅 들어 부랴부랴 책을 사들고 나온 내가 어이가 없었다. 아니, <무소유>를 발견해 그 소식을 알려주었을 뿐인데 왜 그렇게 안달복달해서 나까지 초조하게 만들었냔 말이다!
책이 무거워 집에 가는 내내 투덜거렸지만, 이번 기회에 양장본과 문고본을 한 권씩 마련해서 내심 뿌듯했다. 고등학교 때 언니에게 <무소유>를 빌려 읽어서 언제고 '다시 읽어보마.' 했던 것이 법정 스님이 입적하시고 유언에 따라 책이 절판되자 그제야 조바심이 났다. 재출간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감감 무소식이라 이내 시큰둥해져 버렸다. 그런데 막상 책을 보니 생각이 달라져 구입하고 싶은 마음이 동하는 걸 보고 책에 대한 소유욕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왠지 쉽게 읽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책장에 고이 모셔 두었다. 하지만 시선이 <무소유>에 닿을 때마다 내게 남겨진 숙제인 듯 찜찜한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책을 구입한지 이틀 만에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책을 꺼내들었고, 마치 법정 스님이 내 옆에 계신 양,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고 꼿꼿한 자세로 정독했다.
책은 읽을 때마다 그 느낌이 다르다곤 하지만, 열여덟 살에 읽은 <무소유>와 서른 살에 읽은 <무소유>는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긴 강을 건너온 기분이었다. 기억 속에 사라진 이야기가 다시 살아난 것 같았고, 흐리멍덩한 이미지들은 선명해지고 있었다. 읽은 책을 다시 읽는 다는 것은 지워진 이야기를 다시 살려내는 거라 생각했는데, <무소유>를 읽는 동안에는 법정 스님의 성품이 더 또렷하게 다가왔다. 젊은 시절에 썼던 글이라서 그런지 글 속에 풍기는 스님의 이미지와 최근의 모습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미 <무소유> 안에도 날카로운 시선과 카랑카랑한 성품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을 발견했다. 단지 덜 무르익어 조심스러웠을 뿐, 세월의 흐름과 함께한 참선이 스님의 성품을 단단하게 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책을 읽는 내내 괜히 질책당하는 기분이 들면서도 그 대상이 오로지 나뿐이더라도 싫지 않았다. 질책을 당하는 읽기였다면 분명 불편했어야 마땅한데 오히려 마음이 편한 것도 이상했다. 아무래도 질책 당할 것이 많은 내 자신을 오랫동안 방치하다 <무소유>를 통해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는 기분이 들었나보다.
책에 메모지를 붙이는 작업과 짧은 느낌을 남기는 작업에도 숭고하리만큼 정제 된 행동을 보였다. 책에 대한 경건의 표현인지, 법정 스님에 대한 존경의 시선인지 헷갈릴 정도로 메모지를 덕지덕지 붙이면서도 이 모든 내용을 기억해 보겠다고 애쓰는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럼에도 그 작업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너무 좋은 글귀가 많았고, 나의 환경에 따라 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신기했다. 분명 열여덟의 나는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별 감흥 없이 지나쳤겠지만, 현재 서른의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옴을 느꼈기에 더 간직하고 싶었다. 종교와 사상, 인생철학이나 배움을 떠나 한 사람의 뜻이 깃든 책 앞에서 한껏 낮아지고 만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드러내기 위해 골프를 취미로 삼는 사람들 앞에 '오늘 나의 취미는 끝없는, 끝없는 인내다.'라는 글부터 시작해 '진짜 양서는 읽다가 자꾸 덮이는 책이어야 한다.'로 건너가 '우리는 미워하고 싸우기 위해 마주친 원수가 아니라, 서로 의지해 사랑하려고 아득한 옛적부터 찾아서 만난 이웃들이다.'라며 문장이 점점 깊어질 때면 스님이 말한 양서의 정의처럼 자꾸 읽기를 멈추고 덮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카랑카랑한 스님의 사유를 나눠 받으면서 범접할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곤 했는데, 내 마음에 와 닿는 문장들 앞에서는 스르르 무너져 성큼성큼 다가가고 말았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하고,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거란 생각을 가진 스님을 닮아가고자, 혹은 삶의 본보기로 삼고자하는 거창한 뜻이 있어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단지 나를 질책할 누군가 필요했고, 질책 가운데서 현재의 내 상황을 돌아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는 무언의 절망어린 반항이 내제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고 나자 <무소유>를 읽기 전부터 겁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내가 변화해야 한다고, 내 삶의 방향을 통째로 바꿔야 한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올곧은 분으로 인식되어 있어서인지 그분의 글 앞에서도 지레 겁을 먹었나보다. 법정 스님의 사유를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고, 내가 수용할 수 있는 부분만 수용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순식간에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혼란스럽게 한 것 같다. 그것은 책을 읽는 자세로서도, 스님의 뜻에 합한 좋은 생각도 아니며, 글의 깊이에 동조하며 나와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에 의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질을 흐리는 나의 자세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도 걱정이 앞섰지만, 조금씩 본질을 찾아가니 책 속으로 빠져들 수 있어 그 과정도 감사하게 다가왔다.
한 꼭지가 끝날 때마다 글을 쓴 연도가 나왔는데, 약 30년 전후로 쓴 글들이라 놀라웠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는 베스트셀러를 떠나 지금 읽어도 낯설지 않은 현실에 씁쓸하기도 했고, 오래전에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안목에 감탄했다. 보통 사람이 살지 못한 정제된 삶을 사는 것, 그러면서도 보통인 우리와 부대끼며 다르지 않는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책 제목이 <무소유>라 이 책을 소장하는 여부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지만,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법정 스님의 사유에 나를 대입해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다보면 '소유'에 대한 정죄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성찰들이 곳곳에 드러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고, 왜 이 책이 그토록 사랑받는지, 많은 사람들이 법정 스님을 존경하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함에서 나오는 진리. 그것을 너무 잘 이끌어 내셨기에 그 분 앞에 숙연해지는 마음 또한 감추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