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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반짝 Apr 15. 2021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걸 발명해내기라도 해야겠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도끼 옹(극존칭으로 줄여서 부름)의 작품이 너무 좋은데,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 장황스럽고 세세한 묘사들이 좋으면서도 때론 고리타분하다는 점이다. 매력에 빠지면 계속 읽게 되지만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고리타분한 분위기를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늘 들었다. 그러다 문학동네 번역을 통해 19세기 러시아 소설임에도 현대소설로 읽히는 변화를 또렷이 느꼈다. 아무래도 현재 우리가 쓰는 용어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니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는 모르겠지만(이 부분에서 얼마나 원문에 충실하냐는 의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정확하게 비교할 능력이 없으니 순전히 독자로서의 느낌임을 밝힌다), 요즘 소설로 읽히는 듯한 착각이 들어 굉장히 신선했다. 


소설의 내용은 변함이 없지만 새로운 소설을 만난 듯한 기분이라고 할까? 혼란스러움을 잠시 접고 이 분위기에 빠져들자 굉장히 흡인력 있게 읽혔고, 내가 좋아하는 소설이 새로 번역이 되면 일단 무조건 관심을 갖기로 새로운 다짐(?)까지 하게 되었다. 원문을 비교할 능력이 없다면,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내놓은 결과물을 만끽하자는 또 다른 즐거움을 찾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문학동네의 번역으로 출간된 지 3년 만에『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재독했고, 처음 읽었을 때와 세세한 감정은 다르지만 어떻게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는지 감탄은 경외로 바뀔 지경이었다. 정말 사람이 썼나 싶을 정도로 존경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어떠한 미사여구를 붙여서 이 작품을 설명하든 한낱 개인적인 한풀이(도끼 옹 작품은 정말 좋다는 것에 대한)이므로 이 글에 대해 크게 개의치 말길 바라는 마음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도끼 옹의 마지막 작품이자 ‘그가 평생을 숙고해온 종교적 · 철학적 성찰과 작가적 역량이 집대성된 최후의 걸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원래는 두 편의 소설을 구상했고, 이 작품이 첫 번째에 해당되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도끼 옹이 살아 있었더라면 그 이후의 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펼쳐졌을지 아쉽고, 궁금하고, 안타까웠다. 미챠(첫째)의 선고가 확정되고, 그 이후에 이반(둘째)과 알료사(셋째)의 삶이 어떻게 이어질지 다음 이야기가 있다면 기꺼이 읽고 싶어졌다. 그렇더라도 이 방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친부 살해’라는 큰 사건이 이 소설의 큰 틀을 가지고 있어 나름대로 범인을 추측해서 읽다보면 범죄소설로 바라볼 수도 있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는 친부 살해를 한 모든 증거가 미챠를 향하고 있어서 답답했다. 미챠가 언행을 조금만 조심했더라면 유죄확정이 되지 않았을 테고 그렇게 원했던 그루셴카와 원하는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자신의 존재부터 신의 존재까지 철학적인 고민을 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반이 무엇을 중심에 두며 살아갈지도 궁금했다. 또한 조시마 장로의 말처럼 수도원을 나온 알료샤가 타인에게 어떤 선한 영향력을 끼칠지 지켜보고 싶었다.


결말을 이미 알고 있어서인지 한껏 느긋해진 읽기는 다른 각도로 이 소설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변호사 페츄코비치의 논리적이면서도 절절한 논고에도 불구하고 오심으로 점철된 미챠의 운명이 어쩌면 서투르고 비합리적이고 억울한 미차만의 ‘갱생’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라마조프가의 3형제(혹은 4형제) 모두 안쓰러울 정도로 모성애의 부재 속에 성장했고,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늙은이의 추악한 색욕과 광기’는 살인으로 끝이 난다. 그래서 3형제와 아버지가 수도원에서 조시마 장로와 함께 모였을 때 희극이 연출될 거라 예상을 했지만 미챠를 향한 조시마 장로의 큰 절의 의미가 이 소설의 서막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설령 행복에 다다르진 못한다 해도, 좋은 길을 걷고 계시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시고,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무엇보다 거짓을, 모든 종류의 거짓을, 특히 자신에 대한 거짓을 피하십시오. 자신의 거짓을 관찰하고 매시간, 매분 그것을 들여다보십시오. 또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건, 자신에 대해서건 혐오감을 갖지 않도록 하십시오. 1권 118쪽~119쪽


살아온 환경과 처해진 현실에 괘념치 않고 조시마 장로의 이 말을 믿을 수 있다면, 그렇게 살아갔다면, 다양한 인물들에 처해진 모든 비극이 끝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미챠의 억울함을 알고 있지만 그에게 내려진 형벌이 벌을 의미하고 있지 않으며, 이후에 주변 사람들의 계획대로 그가 탈출을 한다 해도 위법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알료사가 동의하지 않을까봐 두려워했던 것처럼 미챠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탈출이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도 들었다. 그것 또한 미챠만의 방법이라면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도덕적 판단을 보류하고 싶었다. 그렇더라도 ‘친부 살해’라는 패륜은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역자의 말마따나 ‘아버지-신의 살해라는 이념적 차원과 연결’되는 문제로, 이 소설의 전반부에 흐르는 신의 존재와 역할까지 ‘소우주’적인 의미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신을 전혀 반대하지 않아요. 물론 신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지만요…… 그러나…… 신이 필요하다는 건 인정해요, 질서를 위해서…… 세계의 질서 같은 것을 위해서요……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걸 발명해내기라도 해야겠죠. 2권 86쪽


신을 인정하는 사람이나 신을 인정하지만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나, 아니면 신을 완곡히 부정하는 사람이나 이 작품에서 종교에 대해 다룬 부분은 저마다의 스키마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미챠가 자신의 사건으로 논문을 써서 작가로 등단하겠다던 라키친에게 ‘사상의 차이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했듯이 나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 나의 의견을 구구절절 피력할 생각은 없다. 미챠가 쓴「대심문관」에서 대심문관은 ‘그리스도가 기적, 신비, 권위를 거부하고 인류에게 빵 대신 자유를 줌으로써 그들을 영원히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비난’ 하는데, 그런 대심문관에게 그리스도는 조용히 입맞춤을 한다. 이렇듯 도끼 옹은 ‘종교적 · 철학적 성찰’을 열어둔 채 다양한 접근을 허용하는데 이 세상에 만연한 죄와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한 시선도 마찬가지다. 역자의 말처럼 이 소설의 중심에 놓인 문제는 ‘신은 악을 저지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저지하고자 하지 않은 것인가?’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고민이 없었다면 ‘친부살해’라는 사건을 통해 다양한 인물들의 생각과 삶의 방향을 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스메르쟈코프란 인물에 대해서는 섣불리 뭐라 판단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몇몇 사람들만이 스메르쟈코프가 범인이라고 지목하지만 사건의 중요한 발단이 된 3천 루블을 이반에게 건네준 뒤, 모호한 유서를 쓰고 자살한다. 행위를 저지른 자와 죽음을 방관한 자들 가운데 ‘행위’에만 집중했던 관념이(물론 그렇다고 해서 ‘살인’ 행위를 옹호하는 건 아니다) 방관자에게도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음이 더 무겁게 짓눌렀다. 이 소설이 ‘만인은 만인에게 죄인이다’라는 죄의 공동체 의식에서 비롯되는 속죄와 갱생에 대한 희망으로 끝난다고 했듯이, 친부살해의 범인을 밝히다보면 어느 누구도 떳떳하지 못함을 알고 묘한 기분에 사로잡힐 것이다. 스메르쟈코프에 대한 그간의 무시, 방관, 인간으로 생각하지 못한 비존중이 이 사건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런 스메르쟈코프에 대한 책임을 과연 누구에게 물을 수 있을 것이냐는 영원한 물음으로 남아버렸다.


아직 어린 시절 부모님 슬하에 살면서 갖게 된 추억만큼, 앞으로의 생활을 위해 숭고하고 강하고 유익한 것은 없다는 걸 꼭 알아두십시오. (…) 그런 추억을 많이 가지고 삶 속으로 들어선다면, 그 사람은 평생토록 구원받은 셈이랍니다. 3권 520쪽~521쪽


  일류사와 첫 만남은 돌팔매로 시작해 알료사 손에 상처를 남겼지만, 일류사의 죽음 앞에 한데 모여 장례를 치르고 추억이 담긴 바위 앞에서 알료사의 ‘조사’는 뭉클함을 안겨주었다. 일류사는 비록 곁에 없지만 이들이 함께 모여 인연을 맺고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게 만든 건 모두 일류사 때문이었다. 이 순간이 지나고 다시는 못 만나게 되더라도, 서로를 기억하고 가엾은 소년의 장례식을 치렀던 일만큼은 기억하고 삶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알료사의 말에 일류사의 친구들은 환호한다. 세계의 질서를 위해서라도 종교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콜랴는 ‘종교에서는, 우리 모두가 죽은자들로부터 일어나고 되살아나서 서로서로를 보게 된다고’ 일류사도 다시 볼 수 있냐고 묻는다. 알료사는 부활을 말하며 그렇게 될 것이라는 대답을 해주자 소년들은 환희에 넘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요새 감옥에 앉아 있을지라도 나는 존재하고 태양을 보는 거야. 태양을 보지 못할지라도 태양이 있다는 걸 나는 알아. 태양이 있다는 걸 안다면 ― 그것만으로도 이미 완전한 삶이야. 3권 164쪽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 각자가 지닌 ‘구원’에 의미를 두고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알료샤가 조시마 장로에게 그러했듯, 일류사와 아이들이 알료사에게 그러했듯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도, 도움을 줄 방법도 많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재독했을 때 느낌은 좀 달라졌지만 각자 나름대로의 ‘태양’이란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현재를 의미하고 ‘나’ 자신을 지탱해줄 무엇인가가 있다면 다행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미챠처럼 지탱해준 무언가가 너무나 격정적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반처럼 고통 속에서 꼭 무언가를 찾을 수 있기를, 이왕이면 그게 행복이길, 우리 모두에게 진심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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