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온전한 러브스토리다.
오늘날의 세계는 하루하루가 다르다고 합니다.
사실은 하루도 너그럽게 이야기한 것이고 다음 순간조차 예측할 수 없다고 합니다.
순간순간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
불안에 떨고, 때로는 공포까지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게 지금 세상에서는 조금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다 그런 거니까요.
세상은 과거에도 변했고, 지금도 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변해갈 겁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뿐이다"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때때로 어떤 변화들은 너무나 격렬해서, '격변'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의 삶 전부를 무의미하게 만들 만큼, 앞으로의 삶을 조금도 예상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한 변화를 두고 우리는 '격변'이라고 하죠.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삶은 그야말로 격렬하고 치열했습니다. 두려울 만큼 격렬한 변화에서 도망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맞서 이겨낸 사람. 그 어떤 굳건한 의지로 무장한 사람이라고 해도 부서뜨리고, 무너뜨리고, 변절시킬 수 있는 혼란에도 꺾이지 않은 사람.
보후밀 흐라발이야말로 그런 사람이었을 겁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작가의 자기고백처럼 읽히기도 하고, 다짐처럼 읽히기도 하고, 한탄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나라면, 내가 글을 쓸 줄 안다면, 사람들의 지극한 불행과 지극한 행복에 대한 책을 쓰겠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中
이 책은, 그러니까, '지극한 불행'과 '지극한 행복'에 대한 책으로 읽으면 되지 않을까 싶은 그런 책입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주인공은 한탸라는 남자로, 삼십오 년째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문학도 역사도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기에, 모든 게 뭉뚱그려져 폐기로 압축되는 신세에 놓인 시대입니다. 한탸는 가치 있는 책을 발견하면 소장하거나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전해주는 걸 즐거움으로 삼아 일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변화는 그것조차 계속할 수 없게 만듭니다. 더 젊은 이들, 더 강력한 압축기계들이 새롭게 폐지 압축 작업에 투입되면서 한탸는 자신의 자리를 잃게 됩니다. 결국 한탸는 최악이자 최선의 선택을 함으로써, 자기를 지키는 동시에 시대를 거부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남게 됩니다.
솔직히 너무 졸음이 옵니다. 왜 이 졸음을 참고 이겨내며 이걸 쓰려고 하는 걸까 몇 번이나 묻고, 또 묻고 있습니다. 자고 일어나서 써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써야겠다는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고 하던데, 자기 마음 하나 마음대로 못하는 걸 보면 옛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군요.
'상식적'으로 고독은 시끄러울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고요하고 외로운 상태일 수는 있겠죠.
아무리 정적이고 고요한 사람이라고 해도, 사랑했던 이야기가 있고, 행복하거나 불행한 과거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언제나 크고 작은 소동의 원인이 되고, 사나운 바다가 그런 것처럼 겉으로는 고요하지만 안으로는 대단히 시끄러워지기도 하죠.
아무래도 한계입니다.
지금 세상은 한낮의 시끄러움이 잠들고, 소란은 잦아들어 고요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지금 제 머릿속이 그런 것처럼 소란스럽고, 혼란스럽고, 시끄러울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삼십오 년 간 동일한 일을 하며 특별히 더 바라는 것도, 욕심내는 것도 없이 살고 있는 남자에게도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 겁니다.
분명 이런 이야기나 적고 말기 위해 쓰기 시작한 게 아닌데, 이번에는 여기까지가 한계인 모양입니다.
길지 않은 이야기이고, 또 누군가 이야기한 것처럼 '나'를 닮은 이야기이기에 한 번 더 읽고 그때 감상을 다시 적기로 하고 어수선한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출간되는 책을 검열하고 폐기하거나, 밖으로 소리 내어 외치는 입에 재갈을 물려 침묵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의문이나 의심, 소란이나 생각까지 멈추게 하지는 못합니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속의 '시끄러운 고독'이 저는 마음에 듭니다.
인간이 불행해진 건 홀로 방안에 머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봤습니다.
고독, 고독한 인간은 살아남기 힘든 게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야생의 세계에서는 혼자되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고 본능이 가르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고독하지 '않은' 인간과, 고독할 수 '없는' 인간은 결코 동일하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죠.
무엇인가에 늘 의지하고 기대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는, 홀로 남겨진 존재보다 더 빨리, 더 간단히 존재를 빼앗기거나 파괴당하게 될 겁니다.
'독립'이란 홀로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로지 독립된 존재로서 존재할 수 있는 존재만이 온전히 고독할 수 있습니다.
존재와 고독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거죠.
존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나 이외의 존재, 혹은 또 다른 나가 반드시 요구됩니다. 결국 존재와 고독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고민하고 투쟁하는 존재는 결코 고요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되는 겁니다.
"존재와 고독, 고요와 소란은 결국 하나다."라고 적으면 얼마간 정리가 되겠네요.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완전한 러브스토리'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무엇에 관한, 누구와의 완전한 러브스토리인지 그 궁금증을 풀어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 되지 않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