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집착』을 읽고
이 책은 낙성대역 헌책방 '흙서점'에서 샀다.
처음에는 그냥 잠깐 들렀다가 둘러만 보고 갈 생각이었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경우 '구경이나 할까'하는 생각으로 들어갔다가 잔뜩 사가지고 오기는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산 건 나 스스로에게도 무척 '의외'의 사건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아니 에르노'라는 이름이 언제부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다 발견한 책의 등에 집착, 아니 에르노라고 쓰여 있었던 거다.
꺼내서 슬쩍 들춰봤다.
뭔가 얇고 짧아서 매력적이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끌리지는 않았다.
약간의 미련을 담아 다시 꽂았다.
그리고 두 걸음.
오른쪽으로 두 걸음 더 갔을 때 또다시 '아니 에르노'의 이름이 보였다.
『단순한 열정』
아, 이런 뻔한 함정에 걸리다니.
결국 『단순한 열정』을 뽑아 들고는 두 걸음 돌아가 『집착』까지 사서 책방을 나왔다.
『집착』과 『단순한 열정』이 내 손에 들어와 읽히게 된 것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집착의 결과물이다.
책에 대한 집착이라고 쓰려다 지워버렸다.
조금 다르긴 한데 이 두 권의 경우에는 책에 대한 집착이라고 하기보다는 '운명'에 대한 집착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때가 도래하였다."랄까.
『집착』을 포함해서 아니 에르노의 소설은 사실 소설이 아니라 '실제 사건'을 적은 것이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는 '소설'이라고 한다.
사실이 소설이 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시간'이다.
현재가 아닌 과거,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과거가 아닌 주관적인 경험으로서의 과거, 기록이라는 과정을 거치며 해석된 과거.
그것은 이미 사실이 아니라 이야기가 되는 것이고, 그렇기에 소설처럼 읽어야 하는 필연성을 얻게 된다는 거다.
재밌는 의견인데, 어쩐지 동의하고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매력적인 취향이다.
분명 아니 에르노는 매력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야기가 증명하듯이.
『집착』은 한 이혼녀가 만나던 남자에게 이별을 통보한 후 이 남자에게 여자가 있음을 알고 난 이후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자신이 이별을 통보하고서는 그 이후에 질투하고 집착하는 일, 일견 기이해 보이지만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이다.
남의 일이라고 간단히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일상성'이다.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
이별한 후에도 여자는 남자를 가끔 만나 섹스를 하곤 한다. 남자는 지금 만나는 여자에 대한 정보를 일절 제공해주지 않고, 여자는 점점 더 안달해서는 어렵게 남자에게 얻어낸 단편적인 정보들을 통해 '그 여자'일 것 같은 여자들을 떠올린다.
이런 집착이 극에 달하던 순간에 여자는 돌연 다시 한번의 이별을 통보한다.
전화로 말하고, 간단한 이별 편지를 남기는 것으로 이 집착은 아주 깨끗이 사라진다.
우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는 건 안다.
아니 에르노는 이렇게 적었다.
글쓰기는 더 이상 내 현실이 아닌 것, 즐 길거리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엄습하던 감각을 간직하는 방식, 그러나 이제는 '사로잡힘'이자, 제한되고 종결된 시간으로 변해버린 그것을 간직하는 방식이었다.
그런 경험을 자처한 까닭이 마치 이 글을 써내기 위해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 썼으니까 이젠 집착할 게 없다는 그런.
결국 『집착』을 통해 드러나는 건 '집착'의 대상과 정체가 '그 남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자가 집착한 건 남자가 아니라 자신의 기분과 감정의 문제였다. 남자는 다만 '소재'에 불과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집착은 그 발생도 신기하지만, 소멸만큼 신기하지는 않다.
정말 간단히, 그렇게 쉽게 사라질 집착이 어떻게 그렇게 무겁고도 버거운 짐이 되어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짓누르고 압박할 수 있었던 걸까.
정말 묘한 일이다.
아니, 짧게 쓴다는 게 언제 이렇게 길어졌지!
이것도 집착인가 보다.
허허. 그런가 보다.
그래서 갑자기 끝내도 그런가 보다 해야 한다.
기록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