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셰익스피어 <템페스트>

캘리밴의 폭풍우는 아직 오지도 그치지도 않았다

by 가가책방

이번 주 가가책방 고전읽기는 셰익스피어 희곡 <템페스트>를 읽고 모였다. 희곡은 소설보다 짧은 경우가 많지만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읽기 힘들다는 얘기도 자주 듣게 되는 장르다. 나 역시 희곡보다는 소설이 읽기 편하지만 희곡은 소설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어서 종종 찾아 읽곤 한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알게 된 게 있는데 희곡을 읽을 때는 소설을 읽을 때처럼 전체 줄거리나 서사를 파악하면서 읽으려고 하기보다 그 장면 장면이 어렴풋이나마 그려졌다면 오히려 속도감 있게 읽는 편이 낫다는 거다.


인물의 이름이 헷갈린다거나 무대의 구조, 장치가 명확히 그려지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일단은 페이지를 넘기는 편이라는 얘기다. 단순한 이유로 앞뒤를 오가며 명확하게 하기 위해 너무 많은 노력을 하다 보면 지지부진함에 스스로 지쳐서 어느샌가 '잘 모르겠다'거나 '어렵다'는 이미지를 갖기 마련이다. '나의 경우'를 얘기하는 거지만 어떤 장면, 인물의 몇 마디 대사란 극 전체를 생각하면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이라 당장에 이해하기 어렵다거나 갈피가 잡히지 않아도 이후 극이 진행되면서 이해할 수 있게 되곤 하기 때문이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길과 시간을 믿고, 빠르게, 조금 서두르듯 장면을 넘겨 보길 권한다.


<템페스트>는 외딴섬에서 하루 동안 일어나는 마법적인 사건을 펼쳐낸다. 자기의 공부에 몰두하는 사이에 동생에게 군주의 자리를 빼앗기고 내쫓겼으나 한 사람의 도움과 천운으로 살아남아 복수와 회복을 준비하는 한 남자가 무대의 제작자이자 진행자, 주인공이다. 남자의 이름은 푸로스퍼로. 프로스페로 등의 이름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동생뿐 아니라 그런 동생을 인정한 왕에게도 원한을 품고 있다가 기회를 잡아 군주의 자리를 뺏긴 뒤 갖게 된 마법의 힘을 써서 원수들에게 폭풍우를 보내는 거다. 그런데 이 복수가 무척 젊잖다. 폭풍우를 보냈으나 누구도 죽지 않고, 복수를 완성했으나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오히려 군주의 자리를 빼앗기기 전보다 존귀한 존재가 되어 온전한 자신을 되찾게 되는 거다.

'모두 제자리로'랄까.

<템페스트>는 푸로스퍼로보다 그의 딸 미랜더의 대사 "참, 찬란한 신세계로다!"(문학동네_120쪽)라는 대사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라는 제목이 됐다는 얘기로 더 유명한 것 같기도 하다. 비극도 희극도 아닌 무난하고 평화로운 셰익스피어 최후의 걸작.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을까.


<템페스트>는 더 짧게 요약할 수도 있다.

'유폐된 군주 푸로스퍼로의 딸 시집보내기'정도로 말이다. 극의 대부분이 복수의 준비와 실행 과정이고 복수를 완성한 후에는 용서하고 화해한다는 '그 후로 모두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희곡을 읽으면서 유독 또렷하게 떠오르는 건 소중하게 키워낸 딸을 복수의 과정에서 중요한 장치로 활용하는 장면들이다. 자신을 버린 왕의 아들과 자신의 딸을 맺어줌으로써 이전의 지위보다 더 높은 지위로의 상승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딸이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말하면서 사실상의 사기결혼 피해자로 만드는 거다.(애초에 폭풍우를 일으킨 사람도 에어리얼을 보내 무대를 만들고 일을 꾸미는 사람도 푸로스퍼로라는 걸 기억하자)


요약 : 군주였던 푸로스퍼로는 왕자에게 딸을 시집보내 복수도 완성하고 지위도 회복했으며 오히려 더 존귀해졌습니다.


아직까지 언급하지 않았는데 푸로스퍼로가 표류해 머물게 된 섬에는 캘리밴이라는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들이 오기 전까지는 사실상 그 섬의 군주였던 캘리밴이지만 푸로스퍼로 일당이 섬을 점령한 후에는 하인으로 전락하며 악한이라 멸시당한다. 물론 미랜더를 범하려고 시도했던 건 분명 잘못이다. 그러나 캘리밴에게서 섬을 빼앗고, 자신들의 언어를 가르치고 예법을 일러준다며 이전 생활의 평화를 빼앗은 잘못은 푸로스퍼로가 책임져야 할 잘못이다. 동생에게 빼앗긴 자리와 땅은 되찾고자 하며 복수를 정당화하면서 캘리밴의 행동은 인정하지 않는 건 공정하지 않다는 거다.


관대하게 신의 있게 피 흘리거나 목숨을 잃는 일 없이 평화롭게 끝나는 한 편의 이야기지만 시대를 넘어 이어지는 관점의 차이를 읽어내야 하는 과제를 남겼다.


이번 고전읽기를 하면서 느낀 게 있는데 희곡으로 독서모임을 할 때는 소설처럼 서사나 흐름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인물의 대사나 성격, 장치와 배경들을 중심으로 얘기하는 게 더 흥미롭다는 점이다. 어떤 인물의 대사가 더 기억에 남았는가, 어떤 말에 마음이 움직였는가를 이야기 나누다 보면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힌트를 얻기도 하니 말이다.


지금을 사는 우리는 폭풍우의 중심에 있는 걸까, 폭풍우의 시작을 앞두고 있는 걸까, 폭풍우가 지나간 여파를 보는 걸까. 흘러가는 시간이 알려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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