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걸 빼앗기고 남은 것과 기다리는 사람
문학 재활 중이다. 문학 읽기가 일상일 때는 그렇게 수월하게 넘어가던 페이지가 오랜 시간 기름칠하지 않은 기어를 돌리는 일처럼 힘겹고 억지스러워졌기에 노력하는 중이라는 이야기다.
책장을 둘러보다 오래전부터 '언젠가 읽어야지'하며 생각만 하던 책들을, 그중에서도 비교적 얇은 책들을 뒤적이며 한참을 보냈다. 오래 제대로 된 밥을 먹지 않은 사람이 갑자기 기름진 밥을 먹으면 탈이 난다는 걸 알기에 유동식처럼 부드러운, 부담 없는 책을 찾으러 다닌 거다. 지난달 한 달 넘게 들여 이탈로 칼비노 소설 <반쪼가리 자작>을 읽고 다음 차례가 된 책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다. <반쪼가리 자작>도 재밌게 읽었기에 리뷰를 남기려고 했으나 재활의 도중이라 그랬는지 읽기와 쓰기를 세트로 수행하기에는 의지가 모자랐다. 간단하게나마 쓰면 됐을 텐데, 다 핑계지만 그때는 그랬다. 다음에, 다음 책부터. 다음 책이 왔다.
새삼스런 얘기인데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의 제목이, 주인공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도 읽을 수 있었다. 즐겁게 읽고 마음에 무언가 남았다거나 머물렀다고 느끼면 충분했다. 문학은 지식이나 배움보다는 느낌이나 감상이라 믿는 마음에 무게가 더해진 날들이었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는 <백 년 동안의 고독>,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그 마르케스가 맞다. 만약 마르케스를 앞서 얘기한 두 권의 책으로 처음 만났다면 버거운 작가, 어려운 작가로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고, 그런 인식이 너무 이해가 되고 공감이 간다. 나부터도 그 작가가 그 작가가 맞는가 하며 의아했으므로.
그만큼 이 책은 쉽게 읽을 수 있었고, 재밌었다. 편지를 기다리는 대령의 모습이 베케트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떠올리게 했으므로 그 웃음의 맛은 썼지만 말이다.
소설은 대령이 커피를 끓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한 숟가락 남은 커피, 천식 발작을 겪는 아내, 아들은 살해당했고, 싸움닭 한 마리를 남겼다. 그와 그들에게는 끔찍한 10월이었다. 대령은 십오 년이나 오지 않는 편지를 기다렸다. 다음 주에는, 다음에는 반드시 올 거라고 믿으면서. 대령 부부의 일상은 편지와 수탉으로 가득 차 있는데 다른 길, 방법을 강구하는 일 없이 편지는 기다리고 수탉은 팔지 않는다. 차라리 똥을 먹기로 결심할지언정.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는 그 맛이 쓰지만 분명 웃음을 자아낸다. 비극적이고 쓸쓸하지만 왠지 모를 헛웃음이 자꾸만 페이지 사이를 비집고 나온다. 그러다 마지막에 '헉'하는 비명 닮은 헛웃음을 내뱉게 만드는 거다.
무려 십오 년이나 오지 않는 연금 편지를 기다리는 대령은 젊어서 대령이 된 운이 좋은 인물이지만 전쟁에 기여한 수고에 보상받지 못한다. 처음에는 연금 명단에 올랐으나 이제는 명단에서도 사라졌고 기다리는 사이에 정부가 바뀌어 버려서 그동안 제출한 서류가 어디에 있는지도 찾을 수 없다. 마치 목숨을 걸고 죽도록 싸워서 승리하더라도 다음 싸움, 혹은 그다음 싸움에는 죽어서 세상에서 사라질 수탉처럼 소모된 것만 같다. 아들이 남긴 수탉이라는 미련 때문인지, 수탉과 자신을 동일시한 탓인지, 마땅한 임자를 찾지 못해서인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대령은 수탉을 팔지 못한다. 호의적일 거라 믿었던 사람조차 대령의 상황을 이용해 제 값을 치르지 않으려 한다. 모질지만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풍경. 온기 없는 살풍경이다.
대령보다는 더 현실적이고 더 현명한 아내는 자꾸만 다른 방법을 제안하며 재촉하지만 대령은 고집을 굽히지 않는다. 죽음이 목전에 닥치기 전까지는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 완고하게 버티며 오히려 독이 올라 벼슬을 빳빳이 세운 수탉처럼 군다. 그러면서 동시에 겁에 질린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지 않고 버티기 위해, 스스로 순수하고 깨끗하기 위해 가장 더러운 똥을 먹겠다고 선언해 버린다.
'고도'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처럼 '편지'를 기다리는 대령은 거의 맹목적으로 기다리는 중이다. 불확실한 오히려 오지 않을 것이 확실한, 이제는 올 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상황이 되어서도 기다리기를 선택한다. 아내의 애원도 주변의 연민이나 멸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다. 그 기다림의 굳건함은 감탄스럽지만 그만큼 안타까움도 커진다. 어려운 형편에도 커피를 포기하지 못하는 모습이나 금요일마다 편지 도착을 확인하러 외출하는 면모나 끼니는 변변찮아도 수탉에게 먹일 옥수수를 챙기는 일들이 대령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암시한다.
도착한 편지를 확인할 사람, 전해줄 사람인 우체국장은 대령에게 말한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아요."
편지는 오지 않았고, 오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가 계속되어 대령이 죽음에 이르기 직전이 되었어도 편지는 오지 않았을 테고 어쩌면 대령의 선언처럼 몇 달, 몇 년을 똥 혹은 똥이나 다름없는 것을 먹으며 버틸 것이다. 순수함을 위해 더럽혀지지 않기 위해 가장 더러운, 비참한 삶을 연명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대령에게 동정심이 일지는 않는다. 이상하게도 대령은 그럴 수 있고 그럴만했고 그렇게 하는 게 너무 자연스럽기에. 오히려 대령 몫이었을 안타까움, 동정, 슬픔은 그의 아내를 향하며 10월에 죽어 묻히는 이름 모를 악사를 애도하게 한다.
수월히 읽을 수 있고, 골몰하지 않아도 좋으며, 비극이지만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