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런 싸움이 시작된 걸까
공주 교대 운동장에는 특이한 오동나무가 있다. 멀리서 보면 멀쩡히 자란 듯 하지만 가까이 보면 나무 가지의 반은 지면과 수평으로 뻗어있는 것이다. 바로 바란 줄기에는 수평으로 자란 가지를 지탱하기 위한 절판과 와이어가 연결되어 있다. 누군가 일찌감치 수평으로 뻗기 시작하는 가지를 잘라냈다면 지금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수평으로 이만큼 자란 가지를 곧게 자란 가지와 연결해 지탱하지 않았다면 나무는 두 쪽으로 갈라져 죽어버렸을 것이다. 결국 한 줄기에서 난 두 가지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기를 수십 년 계속하면서도 헤어지지 못하고 붙어 있게 된 건 둘이 한 몸, 운명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수평으로 뻗어나간 가지를 잘라낼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이 독특한 모습이 하나의 의미가 되어서 잘라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역시 다른 의미로 운명 공동체의 증거가 된다.
매일 뉴스를 본다. 다만 티브이나 영상으로 보는 일은 드물고 포털의 메인에 올라온 10여 개 언론사의 제목과 논조를 일견 하는 정도다. 그러다 관심이 생기면 한두 편 정도 읽어보는데 그것만으로 충분히 놀라고 슬프고 분노하게 되는 일이 늘어 간다. 최근에는 특히 교육계 뉴스를 유심히 보는데 한 가지 혹시나 하는 마음이 커지는 부분이 있어 짚어보려고 한다.
제도나 법에 밝지 못하고 그렇다고 그 부분을 공부한 후에 글을 쓰려고 하면 다 잊어버릴 것 같아 무지한 상태에서 적는 내용이라 사실 관계나 내용에 오류가 있다면 꼭 알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쓴다.
많은 기사들이 상황을 서술하며 교사와 학생, 학부모의 갈등 양상과 결과를 알린다. 그러면 그 기사의 댓글에 크게 두 부류의 세력이 형성된다. 교사를 애도하는 부류와 학부모를 비난하는 부류. 그 외에도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대세는 아니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느낀다. 다만 이다음이 마음에 걸리는 건데 비판받아 마땅한 가해 학부모 이슈가 학생 전체와 학부모 모두를 일종의 잠재적 가해자인 것처럼 만들면서 교사와 학생의 대결구도로 프레임을 만드는 듯하다는 점이다. 교사와 학부모의 갈등 문제를 인성 문제나 법 혹은 제도의 잘못으로 규정하면서 단순화한 후 해결 방안을 찾는 게 정말 최선인 걸까? 당장 누구를 사법처리 하거나 가해자 누구를 망하게 하면 끝나는 걸까. 마치 누군가는 그렇게 끝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보다 오래, 크게 번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오래전 인류가 아직 사회를 구성하기 전의 혼란을 규정하는 여러 표현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게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다.
하나의 가정을 해보자.
강한 자는 지배하고 약한 자는 착취당하는 게 당연한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투쟁 상태는 강자에게나 약자에게나 긴 시간을 두고 보면 해로운 상황이었을 것이고 결국 어떤 약속을 정해서 오늘날 사회라고 부르는 세계가 생겨났을 것이다. 불안할 평화일지언정 안정을 위해 사회를 만들었고 그 사회를 지속시키기 위해 교육을 도입했을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강자와 약자는 존재했을 것이고 교육의 방향은 크게 지도층과 지지층으로 나뉘었을 거다. 왕과 귀족들은 주도하기 위해 법과 지식을 쌓았다면 평민은 사회를 유지하고 지탱하기 위해 노동과 생산의 기술을 배웠을 것이다. 교육은 시대마다 모습을 바꿔가며 철학자가 필요할 때는 철학자를 위한 교육을 노동자가 필요할 때는 노동자를 위한 교육을 담당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교육이 권력으로 혜택으로 기회로 변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현재에 이르렀다.
사실 나는 조금 더 나쁜 상상을 한다. 단순히 교사와 학부모의 대결구도, 갈등에서 그치지 않고 결혼한 사람들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의 책임공방, 자녀가 있는 사람과 자녀가 없는 사람의 갈등과 다툼, 자녀가 성인인 부모와 자녀가 미성년인 부모의 차이가 단순한 견해나 상황의 다름이 아니라 어떤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혐오나 비난의 대상이 되는 상상이다. 마치 나와 우리 외에는 모두가 싸워 이겨야 할 적인 것처럼 무한히 다툼을 계속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떠올린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기야 할까 하면서도 오늘 함께 웃고 떠들었던 사람과 내일 얼굴을 붉히며 마주 소리를 지르게 되는 일이 아주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가 없다.
최악의 출산율을 두고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들,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와 사람들, 시대의 여건을 두루 고려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거나 잘못이니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원금과 정책으로 회유하다 그마저 부족하게 되자 비극과 절망으로 가득한 미래를 예견하며 그런 미래를 막기 위해서라도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설득한다. 노력이 필요하다고 적었지만 누군가에게는 협박처럼 들릴 암울한 미래를 제시하면서.
오동나무는 예전에는 혼수에 대비해 심던 나무라고 한다. 가구며 살림을 만드는데 쓰고 거문고와 가야금 등 악기의 주재료이기도 해서 쓸모가 많다. 공주 교대 운동장에 있는 수평으로 누운 오동나무는 그 모양이 어떻듯 저마다의 쓸모를 찾을 때까지 배우고 힘껏 성장하기를 바라는 선생님들의 마음을 보여주는 건 아니었을까. 어떤 상황에 있든 지지하고 지탱할 테니 그 자리에서 잘 참고 이겨내 주기를 바라는 따뜻함이 아니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최고나 최상을 목표로 삼아 가르치겠다는 다짐은 아닐 것이다.
아이가 자라며 단체 생활을 시작하면서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다른 아이들과의 문제, 다툼, 갈등에 조심스러워지는 날이 많다. 아이가 누구와 부딪혔다거나 어디를 달려가다 넘어졌다거나 친구와 다투기에 상황을 물어보려고 얘기를 꺼냈더니 아이가 울었다거나 하는 얘기를 할 때마다 조심스러워지는 선생님의 표정과 말투를 본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짐작이 가기에 오히려 시원하게 웃으려고 하지만 내가 웃는다고 다른 사람들 모두가 언제나 웃을 거라는 장담도 없고, 나 역시 지금 웃었다고 다음에 일어날지 모를 다른 상황에서도 시원하게 웃을 수 있다는 확언도 어렵다. 어느 순간에는 화가 날 수도 있고, 감정이 앞설 수도 있고, 다른 아이나 그 부모 혹은 선생님이 미워질 수도 있음을 마음 한편에 두고 현명한 방법을 찾아낼 수 있도록 준비하고 대비하는 게 최선이다.
노키즈존을 선택해야 했던 사람들, 어린이보호 구역에서의 어린이 안전을 위해 만든 민식이 법을 놀이로 만드는 아이들, 갑질과 진상이라는 이름을 앞에 붙인 학부모들. 아이를 둔 아빠로서 그 사람들의 이야기 중 무엇 하나 마냥 남 얘기인 게 없어 괜히 마음이 무겁다. 기본적으로 걱정 인형인 사람으로서 지금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교육계의 이슈가 학생과 학부모 모두가 잠재적 가해자로 규정하고 교사와 학생의 대결 구도로 마무리되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