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다 길을 잃은 누군가를 위해
나는 길 위에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지,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지, 자꾸 질문을 던지다 떠올린 문장이 '나는 길 위에 있다'입니다.
길이란 닦여 있어서 사람이나 차나, 탈 것들이 오갈 수 있는 공간이죠. '길이 아닌 곳으로 가지 말라'거나 '내 발걸음이 향하는 곳이 바로 길'이라거나 '넓고 편한 길보다 좁은 길로 가라'거나 하는 식의 말들이 길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길이 나면 다니기 수월해지고 길이 들면 쓰기 편해지는 우리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배경이 바로 길이라는 생각에서 떠오른 것일 테죠.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정체, 정체성, 자아 같은 말이 교과서에서 탐구를 멈추는 '한 때 빠지는'그런 것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볍게는 요즘도 유행하는 MBTI나 오래전 유행했던 별자리, 혈액형 심리 같은 유행의 바탕에도 자신이 누군지 알고 싶은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어리거나 나이 들거나 바쁘거나 한가하거나 고향에 머물거나 떠나거나 신념을 관철하거나 타협했거나 저마다 다른 모습, 방식으로 정체성을 찾으려 애쓰고 있는 거죠.
'나'가 정체성을 찾으려고 헤매던 주무대가 책이었습니다. 마치 연극이나 영화 속 인물에 이입하듯 소설이나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 얘기 같고 그 마음이 내 마음 같을 때 어렴풋하나마 나와 가까워지는 기분을 느꼈어요. 입에 맞는 음식이 자꾸 당기듯 마음에 맞는 책들이 어딘가에 더 많이, 무수히 존재할 거라는 기대에 빠져 한참을 보냈습니다. 무수히 분열된 자신의 자아를 기록한 작가 페르난도 페소아처럼 지나는 시간, 경험하는 세상에 따라 또 다른 나가 태어났다가 죽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해서 불안해지기도 했는데 그런 불안도 책 속에서 만난 나를 닮은 이들의 이야기, 마음에 비춰보면 진정이 되는 거였습니다.
책은 최고의 안정제다.
그렇게 확신했고 흠뻑 빠져서 한참을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 조금 바빠지고 몸이 피곤하고, 마음에 여유를 한 번 잃고 난 후에는 좀처럼 책 속으로 돌아가지 못하겠더군요. 다시 길 위에 내던져 막막한 울음을 우는 어린아이의 기분이었습니다. 3년은 그런 마음으로 지내다 최근에야 긴 울음이 그쳐가는데 계기는 예전에 다니던 길, 천천히 책 사이로 다니며 오래전 만난 마음들과 재회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과거.
나만의 과거가 아닌 이야기 속 인물과 만나던 순간 화학반응처럼 생겨나 위안이 되어주던 과거와 또 다른 얼굴로 마주하는 기분이 오래 만나지 못했던 옛 친구를 만난 반가움을 닮아 있었습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기분을 느꼈고, 그 길을 지나 현재의 나란 사람이 되었다. 나라는 과거의 배경, 뿌리를 마주하면서 실체 없던 내 존재가 조금이나마 또렷해졌습니다. 그제야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시야가 밝아지는 기분이었어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은 겉보기에는 자식을 잃는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뜻과 다르더라도 조용히 순응하던 한 여성이 조금 더 자기 다운 삶을 살기로 선택한 후 만난 연하 남과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듯 보이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인 여성의 이야기와 그 곁에 머무는 남성의 이야기를 나란히 펼쳐서 서로 다른 이유로 느끼는 불안과 오해의 실체를 등장인물 모르게 독자에게 들려주며 당신의 삶은 어떤지, 당신은 누구인지 묻습니다.
이전에 읽으며 남겨둔 플래그 테이프를 보며 이 책을 읽는 데는 또 얼마나 걸릴까? 이틀? 일주일? 한참이나 못 읽는 건 아닐까? 가벼운 불안으로 읽기 시작한 책을 그 밤, 새벽까지 내리읽어 이야기의 끝까지 읽어버렸습니다. 다 읽고 난 후 떠오른 생각은 "왜 이렇게 됐지?" 하는 질문이었어요. 왜, 이 책이 뭐라고, 중년으로 접어드는 여자와 그의 연하 남자친구의 갈등과 화해 이야기가 뭐라고, 빠져들어서 이야기의 끝까지 헤어나지 못했나 의아해졌던 거예요.
책을 덮고 잠자리에 들기 전 남긴 메모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나와 우리. 난 서툰 인생의 독자처럼 내리읽었다. 처음 정체성을 고민하는 어린아이처럼 흥분하면서 단숨에 빠져들었다. 그건 기이한 열정이었다. _2024.0227.밤.
고민에 서툰 아이, 낯선 감정을 대하는 당황스러움, 그럼에도 빠져드는 기이한 열정.
나를 돌아보는 일, 정체성을 고민하는 첫 단계였어요.
과거의 나를 옹호하지 않으려는 편입니다. 통찰도 사유도 모자란 시기. 지금이라고 더 충만하지는 않지만 지금이라면 하지 않을 실수, 말, 행동들이 변명의 차례를 기다리는데 적당한 이유를 붙여 돌려보내고 싶지 않은 거예요. 『정체성』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던 생각 하나는 '전지전능한 신의 무력감'에 대한 것입니다. 인물의 감정도 알고, 진실도 알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 속속들이 알면서도 소설 속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작가가 그려놓은 이야기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순응해야 하는 상황이 기분을 묘하게 했어요.
소설은 "자, 너의 과거를 돌아봐.", "'기억 안 난다'던 그 말, 지금도 진실이야?", "지금의 너는 정말 너인 거야?" 하는 질문을 자꾸 던지고 있었습니다.
책에서 한 꼭지만 인용하면 이 구절로 하고 싶습니다.
우정이란 기억력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인간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임을. 과거를 기억하고 항상 지니고 다니는 것은 아마도 흔히 말하듯 자아의 총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거야. 자아가 위축되지 않고 그 부피를 간직하기 위해서는 화분에 물을 주듯 추억에도 물을 주어야만 하고, 이 물 주기가 과거의 증인, 말하자면 친구들과 규칙적인 접촉을 요구하는 거야. 그들은 우리의 거울, 우리의 기억인 셈이지._밀란 쿤데라 『정체성』/민음사
우정, 친구들이 들려주는 과거가 지금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이 유난히 와닿았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기억이 아니라 그들의 증언을 포함하는 기억이 우리의 기억이라는 얘기는 정체성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게 만들었어요.
"정체성은 내 안에서 만들어지거나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었던가?"
이런 질문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글의 첫 문장으로 돌아갑니다.
"나는 길 위에 있습니다."로요.
우리에게 역사는 일어난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해석과 영향에 더 큰 비중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잊지 말라는 말은 그 사실 자체를 올바르게 기억해야 한다는 의미이면서 나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가져왔는지 비춰봐야 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정체성』에서 장마르크라는 인물이 F라는 친구와의 우정, 과거 자신이 했다는 말에 인용한 문장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처럼. 위축되지 않고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사회와 환경의 배경이 된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하는 거라고요.
길은 열려 있기에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어느 쪽으로 가거나, 심지어는 길이 없는 곳으로 나아가더라도 또 다른 길과 이어질 거라 믿는 거죠. 그 길에서 새로 누군가를 만나거나 헤어지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단단해지거나 넓어지는 경험을 할 수도 있을 거예요. 어디로든, 열린 길. 내가 나아가는 대로 생기거나 사라지는 길. 안으로 침잠하며 내 안에서 정체성을 찾던 시기가 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때는 몹시 어둡고 외로웠던 기분이 들어요. 더 깊이, 바닥까지 가보면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거야라며 버텨보기도 했는데 끝이 없더군요. 더 외롭고, 슬프고, 소리치고 싶고, 울고 싶어지는 기분만 커졌고요. 그래서 길로 나서려고 했습니다. 갑자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책 속에 나있는 길로 다녔어요. 상처 주거나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길이 거기 있더군요. 전지전능한 신의 무력감이라 적었던 결과를 바꿀 없다거나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는 전개에 순응하는 마음을 배우면서도 '나라면 이렇게'라거나 '나에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는'하는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어요.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건 조금의 과장도 없는 사실입니다.
정체성은 내 안에 없습니다. 자기 안에서만 만들어지지 않고, 혼자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와 우리, 우리와 우리들. 서로를 비추는 존재들이 있고 그 세계와의 충돌 혹은 교류하면서 모습을 바꿔나가는 것이 정체성이 아닐까요. 고유의 정체성은 결코 고독하지 않다고 믿습니다. 지금 가장 가까운 사람, 세계에 자신과 자기 세계를 비춰보세요.
당신, 거기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