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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Feb 25. 2024

알랭 드 보통 불안이 우리의 모습을 할 때

마음을 지탱해주는 사람들이 고마운 밤이다

 오늘도 몇 번의 불안과 안도를 지나 내일을 맞이하는 지금까지 어찌어찌 버텨냈다. 몇 번의 불안이란 게 새롭거나 크지는 않았다. 늘 있는 일이라 특별한 계기나 인연의 도움 없이도 시간만 잘 흘려보내면 그만인 불안 요소들. 다만 한 가지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게 있다. 자발적 마감 시간을 지키지 못했다는 지금으로서는 확정된 지각을 받아들여야 하는 실망감이다. 재촉하거나 강제하지 않는데 혼자 불안하고 초조해한다. 대신 마감을 지켰을 때는 은근한 성취감을 느끼기에 지금의 불안은 다음의 만족을 위한 비용인 셈이다.


 매일 많은 책이 새로 나오고 그만큼 많은 책이 독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저마다 이유는 다른데 만약 책도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사라질 위기 앞에 불안을 느끼거나 꾸준히 읽히는 독자가 존재할 때 뿌듯하지 않을까.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살아남은 책 중 하나다. 처음 출간한 출판사가 문을 닫으면서 사라지는가 했는데 다른 출판사에서 판권을 이어받아 새 옷을 입고 돌아온 것이다. 만약 책 제목이 <만족>이나 <평화>였다면 살아 돌아왔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도 잠깐 해본다.


 『불안』을 마지막으로 읽은 게 벌써 10년은 됐으므로 이번에 다시 읽으며 관점이나 상황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궁금했다. 처음 읽을 때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여기도 표시, 저기도 표시했던 것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질까 아니면 그 정도가 덜 할까. 공감하거나 눈여겨보는 내용이 겹쳐지더라도 그때의 공감과 지금 눈여겨본 이유가 얼마나 같을까 하는 부분도 내 마음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결론부터 적으면 10년 전보다 지금의 내가 덜 불안해하고 있는 게 확실하다. 그때의 『불안』이 바로 지금, 현재의 내 이야기 같았다면 지금의 『불안』은 '그럴 때가 있지'라거나 '그럴 수도 있겠다'는 식으로 반쯤은 남 얘기처럼 읽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의 나 역시 여전히 공감하지만 그 공감이 강박감을 갖지는 않는, 다르게 말하면 불안 앞에서 조금은 여유로워졌다는 실감이 있던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불안의 원인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 이야기하면서 다시 다섯 가지를 해법으로 제시하는 책이다. 원인 다섯 가지는 차례대로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이고 해법 다섯 가지는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다. 처음 읽을 때도 그랬는데 읽어보지 않아도 원인 다섯 가지는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 것 같았던 것에 반해 해법은 뭔가 얼른 와닿지 않는 게 끼어 있었다. 


 최근 쇼펜하우어 관련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것만 봐도 철학은 익숙하고, 예술로 승화시키거나 표현하는 게 불안을 해소하거나 덜어주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것도 상식적으로 알겠는데 정치는 도무지 감이 안 잡히고, 기독교는 내 종교가 아니며, 보헤미아는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번에 읽은 걸로 네 번 혹은 다섯 번째 읽었을 텐데도 이런 기분이다. 불안이 갖는 성질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불확실하고 늘 변하기에 무엇이 도움이 될지 선입견을 갖거나 확신하지 말고 유예하면서 읽는 게 낫겠다는 본능의 작용일지도.


 내가 불안을 달래는 일반적인 방법은 문학을 읽는 것이다. 되도록이면 낯설고, 지금 시대와 이질적인 세계 속에서 비슷한 감정과 상황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들이 사랑하고, 갈등하고, 기대하고, 복수하고, 후회하고, 용서하는 이야기들이 위로가 됐다. 내가 저지른 어이없는 실수, 실제 마음과 다른 행동, 배려인지 비겁함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함, 기대하고 오해하고 실망하면서 소설처럼 반전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막연한 희망. 근본적으로 해소해주지는 못하지만 필요한 만큼의 위로가 되어주던 고마운 주인공들 이야기를 알랭 드 보통의 『불안』속에서 다시 만났다. 


 특히 공감이 가는 원인을 꼽으면 사랑결핍과 기대가 있다.

거의 모든 행위, 갈망의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사랑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어서'라는 이야기가 마음 깊이, 아플 만큼 깊이 들어왔다. 예전의 내가 지금보다 더 못났던 이유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서 사랑을 줄 줄 모르기 때문'이라는 착각을 사실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사랑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기에 사랑받기 위해 애쓰거나 분투하면서 혼자 지치고 실망하는 경험의 반복이 어느 순간에는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이상한 질문도 자꾸 던졌다. '나는 왜 사랑받지 못하는가'라거나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걸까'같은 나쁜 물음을 반복하다 보니 억울하면서도 더 노력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사랑받을 수 없을 거라는 불안에 시달렸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사랑받지 못했다'는 생각은 이기심이거나 치기 어린 마음이 컸고, 이해하려는 마음보다 이해받겠다는 욕심이 앞서는 데서 생겨났다는 걸 고백할 수 있게 됐다. 그 착각이 만든 비극에 등장하는 이들에게 일일이 사과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경험과 그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기에 고마움을 먼저 전하는 게 더 옳은 선택일 것이다. '내 잘못'이라는 생각도 잘못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잘못해서 벌을 받은 게 아니라 그저 그 사건들이 일어난 것뿐이었다. 내가 불러온 것이 아니라 들이닥쳤던 것이다. 그때의 어린 나에게, 하루하루 불안했을 나에게 꼭 해주고 싶은 첫마디가 "네 잘못이 아니야"다. 물론 그 뒤를 이어서 '네 잘못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하며 끝나지 않는 잔소리를 늘어놓겠지만.


 공감 가는 원인으로 두 가지를 적었지만 사실 『불안』에 등장하는 원인 다섯 가지는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마음은 감정과 상황으로 엄밀히 나누어지지 않는다. 불안한 감정과 불안을 느끼는 상황은 늘 동시에 일어나고, 상황마다 달라진다. 사람을 친구 아니면 적으로 나눌 수 없는 것처럼 불안의 원인도 해소 방법도 둘 중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원인을 하나로 좁힐 필요도 없고, 혼자 해결하려 하지 않아도 되며, 지금 당장 떨쳐버리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불안은 그렇게 털어지지 않는다.


  지금의 내가 선택한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알랭 드 보통의 『불안』속에 해법으로 등장하는 요소들이 몇 가지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더 다양한 기회와 문화가 있는 대도시를 떠나 소도시에 살며 얻었다고 믿는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도망자나 패배자로 낙인찍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지금 마음이 내가 불안을 덜어낸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기준이나 큰 만족보다 내 소소한 즐거움이 더 소중하다. 더 큰 성공의 기회를 꿈꾸며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을 최대한 끌어모으는 일에 부지런해지는 것도 좋지만 지금처럼 읽은 책에 대해 쓰거나, 책을 읽으며 떠올린 마음속 생각을 적을 수 있다는 것이 큰 성공만큼이나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불안』에서 알랭 드 보통이 인용한 문구 중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영혼에 필요한 것을 사는 데 돈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돈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가 아니라 그렇게 많은 돈까지는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토록 많은 시간과 인내를 들여서 얻을 만큼 영혼,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과 흔히 같다고 믿는 영혼의 고통을 외면하면서까지 불안에 떨며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애쓰는 걸 그만둬도 된다는 의미 아닐까. 


  시작하며 자신 있게 '예전처럼 불안하지는 않다'라고 적었지만 사실 지금도 불안은 늘 찾아온다. 달라진 건 내가 우선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예전보다 조금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는 사실과 이야기를 털어놓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쯤 생겼다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과의 교류, 인연을 이어가는 것도 좋지만 내게는 그게 더 어려웠다.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차갑지 못한 마음이 오히려 상처를 키우고 불안에 떨게 한 경험도 적지 않았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사랑받는다는 말의 의미를 조금 더 넓게 볼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서툴다. 속물근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는 걸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부러움과 감탄을 질투심 없이 표현하는 연습을 계속하고 있다. 남이 흔하게 가진 게 내게 없음에도 하나도 부럽지 않을 자신이 내게는 없다. 거기까지 내 능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한계를 인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돈도 건강도 사회의 변화나 정세도 확신할 수 있는 게 드물기에 불안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다. 노력하는 동안은 덜 불안하고, 불안한 상황이 와도 조금 자신이 생기는 기분이 되므로.


 예전에 왜 그렇게 불안했을까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가장 명료하게 들리는 대답이 '불안하지 않은 척해야 할 것 같아서'다. 약해 보이면, 불안해 보이면 오히려 더 힘들어질까 봐 어딘가에, 누군가에 의지하거나 도움을 청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내 불안함으로 가까운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건 너무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잠깐 함께 불안에 떠는 게 영원히 슬퍼하며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지금처럼 불안했다거나 불안하다고 약한 모습을 이렇게 드러내도 그다지 부끄럽지 않으니, 이만큼 자란 내 마음이 얼마나 다행한가. 보이지 않게,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내 불안한 마음을 지탱해 주는 사람들에게 고맙고 감사한 밤이다.


알랭 드 보통_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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