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가책방 Feb 17. 2024

나쓰메 소세키, 마음속 세계에서

마음이 죽은 사람의 이야기

 내 마음을 이야기하는 게 여전히 제일 어렵습니다. 불안하거나 잘 모르겠어서 그럴 때도 있지만 '이게 내 마음이구나'하고 인정하는 순간의 편안함보다 이후에 감당해야 할 무게가 두려워서 더 그래요. 내 마음이면서 나만의 마음일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겨난 경험과 관계의 마음은 어린 날에나 지금이나 조심스럽습니다. 어렵고 두려우며 조심스럽지만 늘 마음에 대해 생각하고 쓰려고 애쓰는 중이에요. 언젠가의 극적인 화해를 위해, 극적인 화해를 위한 이해를 위해서, 하루 한 줄의 노력을 계속하는 중입니다. 이 글은 내 마음과의 화해와 이해를 위한 작지만 최선을 다한 노력의 흔적이고요.

 

 열다섯 무렵입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돈거래에 신중해야 한다는 걸 온 세계가 무너지는 듯한 경험으로 배워야 했어요. 몸의 피로나 고단함보다 사람을 믿을 수 없는 마음과 혼자라는 생각이 더 괴로울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고작 열네 해의 삶으로는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고 세상의 작동방식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다만 웅크린 채 견뎠을 뿐입니다. 믿지 않고, 의심하고, 의구심을 품고, 마음 놓거나 다가가지 않으면서 가끔 숨죽여 우는 날을 보냈죠. 책과 가까워진 것도 그때부터입니다. 어린 날 우리 집에는 이웃집에서 얻어온 전래 동화와 몇 권의 위인전 그리고 유행하던 백과사전 전집이 있었을 뿐이라 책, 특히 문학과 가까워질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요즘처럼 인터넷이니 스마트폰이 흔했다면 다른 삶을 살았겠지만 그때는 자연스럽게, 다행히 책과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강한 의지가 아니어도 저절로, 자연스럽게.


 나쓰메 소세키 『마음』은 그런 삶의 연장선에서 마주한 이야기입니다. 스무 살, 대학 도서관 서가를 돌아다니다 제목이 눈에 띄어서 읽기 시작했다는 흔한 계기. 운명의 책은 만나진다는 믿음을 갖게 한 책이 바로 『마음』이었죠. 오늘 나에게 가장 필요한 이해, 위로를 가져다주는 인물이 운명처럼 책 속에서 등장한 겁니다. 이런 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런 순간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명료한 단어는 '기적'말고는 없겠죠.

한밤의 마음

 『마음』은 스무 살 무렵의 나가 선생님이라 부르는 사람을 만나고 알아가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100년도 더 전의 1912년 무렵의 일본이 소설의 배경이고 연작 형식으로 「선생님과 나」, 「부모님과 나」, 「선생님과 유서」세 편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소세키는 총 열네 편의 장편 소설을 남겼는데 그중 마지막 소설은 미완으로 남았고 『마음』은 열두 번째 소설입니다. 첫 장편 소설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비교해 보면 사건 자체는 단순하고 등장 인물도 적지만 대신 사람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고 들려주는데 힘을 쏟는 게 느껴졌어요.


 대학생인 '나'는 여름 휴가지에서 우연히 '선생님'을 알게 됩니다. 선생님은 도쿄에 살며 특별히 직장에 다니거나 일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만큼 부유하죠. 아내와의 사이에 아이가 없어 넓은 집이 쓸쓸하다는 것만 빼면 부족함도 모자람도 없습니다.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한 인재지만 무슨 일이든 시작할 생각이 없어요. 선생님의 아내도 선생님이 왜 그러는지 알지 못하는데 예전부터 지금 같았냐는 '나'의 물음에 선생님의 아내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며 어느 날부터 갑자기 변해버렸다고 합니다. 이유는 몰랐고요. 선생님도 그 이유를 누군가에게 밝힐 생각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부유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집안 출신입니다. 도쿄 제국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으며 시골에 부모님이 계시고 위로는 형님이 있어서 먼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고, 아래로 시집간 누이가 있죠. 아버지에게는 신장 쪽 병이 있고 이 병으로 선생님의 장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시골 유지의 외동아들이었는데 장티푸스로 부모님을 갑작스럽게 여의고 숙부에게 재산을 맡겼다가 배신을 당하며 남은 재산을 처분해 고향을 떠난 후 다시 찾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아내를 만난 시기는 숙부에게 배신당해 고향을 떠난 뒤인데 이때까지는 다른 인간, 타인에 대한 신뢰는 잃었을지언정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는 잃지 않은 상태였어요. 내 표현대로 하면 '마음이 절반쯤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세상을 향한 절반의 마음과 자신을 향한 절반의 마음. 자기 자신만은 믿을 수 있다는 절반이 무너지는 계기는 하숙으로 들어간 집에 가문에서 내쫓긴 친구를 들인 후예요. 지금은 아내가 된 선생님 하숙집 딸과 친구가 가까워지는 게 두려워 친구를 기만하는 비겁한 행위인 줄 알면서 자기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지 않은 채 결혼을 결정한 합니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충격이었는지 가문에서 쫓겨난 처지를 비관해서였는지 혹은 둘 다였는지 선생님의 친구는 갑작스럽게 자살하고 말죠. 남긴 유서에는 누구를 원망하거나 비난하는 말 없이 '좀 더 빨리 죽었어야 했는데 왜 지금까지 살았을까'하는 의미의 문구가 있었을 뿐입니다. 선생님은 곧바로 이사를 하고 결혼을 하고 지금까지 살아있었지만 친구의 죽음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오히려 마음의 절반마저 죽어버린 채 15년 정도의 시간을 숨 쉬었을 뿐이죠. 


 이 소설을 모르는 사람에게 지금까지 적은 글은 별 의미 없는 글자의 나열일 거란 걸 알면서도 여기까지 적었습니다. 단지 이 책이 하나의 독자에 불과했던 내 마음을 어떻게 움직였는지 쓰기 위해서.


 선생님의 친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선생님의 나이는 스무 살 남짓에 불과합니다. 소설 속 '나'의 나이와 비슷하며 이 소설을 처음 읽던 독자 나와도 비슷하죠. 선생님과 '나'가 만나는 건 15년 정도 후인데 그때에도 선생님은 아직 마흔이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지금이 시대에는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젊은 선생님은 왜 그토록 깊은 절망 속에서 스스로를 폭력적인 죽음으로 이끌어갔던 걸까요.


 열네 살 무렵부터 높은 곳에 올라가면 온몸의 피가 저 아래,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은 기분에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질풍노도의 시기, 중 2병, 그런 것이었겠지만 죽음이 늘 가까이 있는 것 같고 죽음을 택하면 더 이상 누구를 믿거나 믿지 못하거나 주변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평화로운 상태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자주 했어요. 달콤한 죽음, 유혹은 악마가 속삭이는 것 같았죠. 죽음을 생각하는 잠깐은 꿈꾸듯 '그래, 그러면 편해질 거야'하다가 금세 정신을 차리며 '그건 누구를 위한 선택도 될 수 없다'라고 속으로 소리치곤 했어요. 나를 위해서도, 부모님을 위해서도, 내가 미워하거나 걱정하는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자꾸 되뇌었습니다. 나약함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지에 있어서는 선택지가 바로 죽음이라고 생각했어요. 살아야 한다고, 살아남아야 한다고.


 지금은 이런 마음 상태를 '우울'로 쉽게 진단 내립니다.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해도 '너무 예민해서'라거나 '신경성'이라거나 '마음을 편하게'하는 식으로 간단히 약을 처방해서 해결하려고 하더군요. 고민이나 괴로움의 근원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은 너무나 어렵고 복잡하므로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천천히 해결해 보자는 얘기인데 급한 불을 끄고 나면 천천히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기 어려워지기 마련입니다. 사람 마음이 화장실 들어가기 전과 나올 때가 다르다는 건 다 아는데도 그렇게 하는 게 쉬우니까 임시나마 쉬운 길을 택하라고 하는 것 같아 더 질리는 마음이 되기도 합니다. 변해야 한다, 변할 것이다, 변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개인의 치열한 노력, 강하고 굳은 마음에 책임을 떠넘기죠. 사회적 책임이나 관계의 중요성보다 개인의 문제로서 패배하거나 실패한 인생이라고 낙인을 찍어버리기도 합니다. 


 15년 넘는 시간 동안을 우울과 함께 했습니다. 대학에 가면 달라질 줄 알았던 세상은 여전했고, 단순히 시간이 가면, 지금을 넘기면 될 거라는 기대는 매일 무너졌어요. 사람은 여전히 모르겠고, 마음은 더 알 수가 없고, 알 수가 없으니 믿기 어렵고, 믿지 못하므로 시작되지 않는 상황이 반복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운이 좋았다고 말합니다. 지금의 내가 있는 것, 단지 살아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나마 지금의 마음이 될 수 있던 모든 상황이, 계기가 정말 우연이나 운이라는 말이 아니면 설명하기 어려운 변화에 이르렀기 때문이에요. 내가 한 건 단지 버티며 마음을 알기 위해 책이나 읽으면서 질문하고 답을 구했을 뿐인데 이만큼 나아지다니 운이 좋았거나 기적이 아니라면 가능했겠어요?

 

 서른 다섯 즈음의 『마음』속 선생님의 고뇌와 죽음이 스무 살이던 내게 왜 와닿았는가, 어떤 의미가 되었는가를 되짚어 봅니다. 


 선생님은 천진난만하게 부유한 집안의 외동아들로 살았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주변에서 말하는 재산의 관리나 사람의 변심 혹은 욕심에 무지했으며 무관심했어요. 처음 선생님은 자신을 배신한 숙부와 그 가족, 지역 사회를 탓하며 미워서 거리를 둡니다. 그러다 그들을 미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방심했던 자신의 책임을 묻기에 이르렀을 것이고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렸기에 뭔가를 선택할 수 없었고, 솔직하면 누군가에게 마음의 짐을 지우는 것이 될까 봐, 다른 사람들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비난하거나 비웃을까 봐 두려워했던 약한 나를 원망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이 다 이상해도, 믿을 수 없어도 그럼에도 순수하고 진실한 나 자신을 믿는 마음이 커졌을 거고요. 세상이 다 부패하고 망가져도 자신만은 굳건하리라, 올바르리라, 변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기도 했을 겁니다. 이 믿음이 있는 한 세상 모두를 적으로 맞서도 외롭지 않을 거라고, 절망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다 자신이 친구를 기만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기만인 줄 알면서,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고, 용기를 내서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음으로, 내일로 미루었던 자신의 비겁함에 자신 역시 그동안 멸시하고 비난하던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절망하며 무너져 내렸을 겁니다. 그 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남은 삶을 후회와 사죄로 보내기로 마음먹은 건 아니었을까요. 


 내 마음이 오래 그랬습니다. 무기력하게, 누구를 믿으려 하거나 믿지 않으므로써 배신당하지 않는 삶을 살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나는 법과 규칙을 지키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거나 배신하지 않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왜 다른 사람들은 지키지 않는가, 인간은 스스로에게는 얼마나 한 없이 관대한가, 모순된 말과 행동은 얼마나 우스운가 하는 비웃음을 삶의 동력으로 삼는 날도 있었습니다. 기꺼이 오해를 자처하고 변명하거나 이유를 말하지 않았어요. 누군가는 그런 나를 오만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그런 필요를 못 느끼는 상태가 오만이라고 해도 나는 그게 나라고, 그런 나가 가장 편안하다고 믿으려 했습니다. 그런 마음이 아니면 견딜 수 없을 테니까, 오해받는 게 나았어요. 그런 나였기에 소설 속 이런 장면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이따금 내게 보여준 쌀쌀맞은 인사나 냉담해 보이는 행동은 나를 멀리하려는 불쾌감의 표현이 아니었다. 가엾은 선생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사람에게, 가까이할 만한 사람이 아니니 그만두라는 경고를 보냈던 것이다. 남이 반가워하는 것에 응하지 않는 선생님은 남을 경멸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경멸한 것 같다.『마음』_현암사_24-25p


 이런 문장도 있습니다. 

난 지금보다 한층 외로울 미래의 나를 견디는 대신에 외로운 지금의 나를 견디고 싶은 거야. 자유와 독립과 자기 자신으로 충만한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 이 외로움을 맛봐야 하는 거겠지. 『마음』_현암사_50p

 지금의 우울함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무언가에 기대려 하지 않았어요. 아주 친한 친구도 원한을 품은 원수도 없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래야 하는 순간에만 왁자지껄 웃고 혼자로 돌아가기를 반복했습니다. 실망하게 하고 싶지도 않고 실망하고 싶지도 않았던 내게 나란 인간의 한계가 다른 누군가를 반드시 실망하게 할 것이며 그렇게 생각하는 한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늘 실망하게 될 거라는 걸 안다고 생각했던 거죠.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진리. 그 편협한 진리에 매달려 오래 발버둥 치기를 자처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외로울 수밖에 없다거나 타인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식의 필연을 앞세워 혼자를 정당화하기도 했어요. 곁에 사람이 많을수록 더 외로울 거라는 생각을 위안 삼았습니다. 그럴수록 더 외로워졌지만 덕분에 무감각해질 수 있었고요.


 소설에서 이해할 수 없는 건 '나'와의 만남이 선생님에게 이제는 괴로움 속에 사는 걸 그만둘 때라는 운명의 신호였음은 분명하지만 그만두는 방식이 죽음을 택하는 것이어야 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해 온 고통, 경멸의 이유를 이제라도 밝히고 죽어버린 마음을 되살리려는 노력조차 불가능했던 건 왜였을까. 만나서 이야기하려던 마음을 되돌려 유서로 대신한 결정적 계기가 무엇인지 오래 궁금했습니다. 지금 떠오르는 이유는 그 시대의 모습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일본은 전형적인 가부장제 사회였죠. 남성이 우월하다는 표현, 여성이 열등한 이유가 이 소설 『마음』에도 여러 번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런 여성에게 자신의 과거, 잘못을 밝히고 함께 고통을 짊어지기를 부탁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을 거예요. 또 하나는 '순사'라는 개념입니다. 순사는 오랜 옛날 왕족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아내나 하인을 함께 매장하는 순장에서 온 것인데 1912년 메이지천황이 사망하자 그를 모시던 노기라는 대장군이 순사 했다는 소식이 신문에 실렸다는 내용이 소설 속에 등장합니다. 그 소식을 보고 선생님 역시 결단을 내렸다는 암시가 있어요. 꼭 그런 이유는 아니지만 약간의 떠밀림 정도의 이유는 됐을 겁니다. 오래 자기 마음과 싸워온 사람들은 때로는 자기 마음 밖의 무언가가 자신의 등을 떠밀어주길 바랄 때가 생겨요.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단 한 걸음을 더 떼어놓게 만드는 힘이 어느 순간에 작용하는 거죠. 만약 소설에서 '나'의 아버지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어 고향에 더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갔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오늘의 내 삶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지금도 여전히 마음이 죽은 사람 중 하나였던 시기의 나를 기억해요. 아직도 회생 중이라 경계심이나 의구심을 완전히 떨치지 못하는 흔적을 곳곳에 남기고 다니고 누구에게 먼저 연락하거나 교류하기를 즐기지 못하는 소극적인 모습도 여전하지만 내 심장의 피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향해 뿌려지지 않고 몸속 곳곳을 돌며 활기와 영양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살아있음을 항상 실감하는 건 아니지만 살아가며 배우고 읽고 쓰며 돌아보는 동안 조금씩 실감의 빈도가 늘고 있음을 느끼는 데 만족하려고 하죠.


 지나가버린 일을 두고 만약이라는 가정하기를 즐기지는 않지만 자꾸 얘기하게 됩니다. 

만약, 내가 책을 가까이하게 되지 않았다면.

혼자 책을 읽는 일에서 그쳐서 독서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면.

큰 마음을 먹고 나간 독서 모임에서 지금도 고마운 그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후로도 책을 즐겨 읽으며 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 나누는 기회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내 심장이 힘차게 뛰며 온몸으로 활기와 영양을 보내주고 있었을까.

 이렇게 지나간 일이라며 오래 묻어두고 이야기하지 않으려던 마음들을 돌아보며 조금 더 편안해진 마음으로 다음에 읽을 책으로 마음을 옮기는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났을까.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잘 해낼 자신이 없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해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죽은 듯했던 마음을 되살려 낸 거란 걸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모든 사람에게 책이 구원일 수는 없겠지만, 상처받은 사람에게 문학은 큰 위로와 위안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문학이란 결국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것이므로 나를 닮은 사람과 내 경험과 비슷한 사건과 만나기도 하죠. 시대가 다르고 세대와 성별이 다를 테니 이야기마다,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고 결말도 달라집니다. 그들의 갈등, 슬픔, 절망, 고통에 더 슬퍼지기도 하지만 이해, 소통, 변화를 보며 꿈을 꿀 수도 있습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문학이 내미는 구원의 손길인 것입니다. 그 손길을 잡을지 놓을지, 어디까지 따라갈지는 모두 독자,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고요.

무너지거나 쓰러지지 않도록 지지하는 마음들

 한 번 죽어버린 마음은 좀처럼 되살아나지 않아요. 되살아 난 것처럼 보이다가도 간단히 죽어버리기도 하고 더 깊이 가라앉기도 합니다. 살아갈만한 이유, 보람을 찾는 일과 살만하다고 느끼는 순간을 한 번이라도 더 발견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만 해요. 마음이 죽어버린 것 같은 기분을 모르는 사람들은 마음이 죽은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려운 게 당연합니다. 쉽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사람이 발 밑만 보고 걸으려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아요. 불안해하는 사람에게는 불안의 이유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지만 불안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불안해하는 사람이 오히려 불안한 것과도 다르지 않고요. 


 글을 마치기 전에 한 문장을 인용하고 그 인용에 한 가지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질린 나는 자신에게도 질려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네. 『마음』_현암사_265p

 이런 사람들은 속마음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지만 혹시라도 우연한 기회에 누군가가 사람들에게도 자신에게도 질려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됐다면 간단히 그 사람을 단죄하거나 심판하지 말기를 부탁합니다. 타인을 경멸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경멸하는 사람이 있으며 그것이 오만이 아니라 자포자기에 가까운 마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주세요. 그런 짧고 사소한 유예가 마음이 죽어버린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전 01화 모두들 마음에 이야기를 숨기고 살아간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