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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Mar 17. 2024

파트리크 쥐스킨트, 좀머 씨를 좀 내버려 두세요

책 속 인물은 오늘의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오래전부터 어떤 소설이나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늘 '나와 닮았다'는 동질감이다. 시대도 나이도 심지어 성별이 달라도 닮았다는 느낌은 찾아왔다. 그런 책들은 몇 개월 혹은 몇 년쯤 지나 우연이거나 필연으로 다시 읽게 된다. 빠르거나 조금 늦어질 뿐 반드시. 그럴 때면 처음 읽을 때보다 한참 나이 든 나처럼 함께 나이 든 것만 같은 인물의 변화에 기이한 반가움과 당황이 교차하는 기분이 된다. 책 속에 글자로 고정되어 옴짝달싹 못하는 인물은 어떻게 성장하고 변해가는 걸까. 처음에는 작가의 출중한 능력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독자와 함께 성장할 수 있을 정도로 살아있는 듯 입체적으로 그려낸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는 것이다. 실제로도 그런 새로움, 낯섦, 생생함에는 작가의 재능이 크게 작용한다. 하지만 책 속 이야기가 변하고 인물들이 성장하며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는 이유가 그것 하나일까?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여러 시도를 했다. 그리고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그 가설은 이런 것이다.


 "책 속 인물은 오늘의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얘기는 얼마든지 있다. 

세상이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거나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식의 말들이다. 모두 공감하는 말이지만 세상이란 지금 나와 우리가 사는 터전이라 남의 일처럼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변화의 폭이나 결에 한계가 명확하고 과감하게 바꾸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드물게 있지만 그건 오늘 쓰는 이 이야기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만큼이나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현실 속 세상은 필연적으로 나를 속박한다. 세상에게 가두려는 의지가 없어도 스스로 갇혔다고 느끼고 벗어나려 하거나 적응하기 위해 애쓴다. 벗어나려는 사람과 적응하려는 사람은 서로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고 다른 방향으로 노력하기에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더욱이 벗어나려는 사람들은 벗어나려는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적응하려는 사람들은 적응하려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마련이므로 둘은 마치 대결하듯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책과 세상이 다른 지점이 여기다. 우리는 책에서 둘 모두를 만난다. 그리고 그들을 보며 내가 어느 쪽에 속해있는지 어렴풋이 혹은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책과 현실이 닮은 모습은 또 있다. 

 책 속에서 나와 닮았다고 느끼고 깊이 공감하면서도 미운 인물이 있는가 하면 전혀 다르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해서 정반대처럼 느끼는 인물을 응원하고 좋아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최선이자 한계라고 자각하는 스스로를 인정하면서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꿈꾸는 지향점에 선 인물에 동경 어린 시선을 던지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 나와 같은 점이 많아서 쉽게 가까워지고 친하게 어울리면서도 미운 점이나 잘못이 자꾸 눈에 들어와 다투게 된다거나 나와 정반대인 사람들에게서 매력을 느끼고 그들을 궁금해하는 마음이 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고 속으로 되뇌지만 이미 그 말을 떠올렸다는 것 자체가 부러움을 느꼈다는 증거라서 부러움을 느껴버린 자신을 모순된다고 느끼며 어리둥절해하는 것이다. 책 속 인물이나 이야기에서 그런 순간과 마주했다면 나와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는 생각에 금세 거리를 둘 수 있었겠지만 현실에서 같은 일이 일어나면 확신해서 흔들리지 않겠다고 생각한 신념조차 흔들리고 만다. 


 모두 다, 내 얘기다. 나는 늘 확신하려고 하지만 항상 흔들린다. 오히려 확신해서 더 심하게 흔들리고 휘둘린다. 때로는 세상이 무너진 듯한 절망적인 마음이 되기도 하는데 '내가 그럴 리 없다'거나 '나는 절대 그러지 않겠다'며 오래 지켜온 다짐을 스스로 깨뜨릴 때 그랬다. 다짐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지만 다짐이 없으면 오늘 남은 시간은 무엇을 딛고 서 있을 수 있는가 말이다. 결국 다짐하고 깨뜨리고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를 처음 읽던 무렵은 상투적으로 '절망의 강을 건너던 시기'다. 온갖 어둡고 절망적인 인물들의 이야기들을 쉼 없이 읽는데 그 모두가 내 얘기 같았다. 지금 그렇거나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거의 모든 작품 속에서 뛰쳐나와 내 앞에 길게 줄을 만드는 거다. 나쓰메의 선생님, 카프카의 그레고르 잠자, 다자이의 요조, 멜빌의 바틀비, 쥐스킨트의 좀머 씨. 그날의 나는 도망치고, 숨고, 다시 도망치는 중이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좀머 씨 이야기』는 짧다. 한 사람의 일생을 담기에는 무척 짧다. 제목에 좀머 씨가 들어가지만 사실 좀머 씨 얘기보다 화자의 이야기가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화자의 내 얘기에 좀머 씨의 기이한 행동과 마지막이 끼어들 듯 등장하는 것이다. 어린 화자와 접점이라고는 우박이 쏟아지던 날 아버지의 차 속에서 단 한 번 만나 목소리와 표정을 가까이에서 봤을 뿐이다. 그런 남이나 다름없는 한 사람의 얘기가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지금 되살아 난 건 몇 번 목격한,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마지막으로 본, 좀머 씨가 어린 화자에게 그만큼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좀머 씨는 이상한 사람이다. 하루 종일, 때로는 밤늦게까지 수 킬로미터에서 수십 킬로미터를 거의 쉬지 않고 돌아다닌다. 늘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데 너무 오래 걷다 보니 마치 다리가 세 개가 된 듯하다. 사람들이 말하길 좀머 씨가 그렇게 늘 걸어 다니는 건 밀폐 공포증 때문이란다. 밀폐 공포증에 걸리면 닫힌 공간에 있는 게 두려워 견디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지쳐 나가떨어지도록 걸어 다닌 후에 쓰러지듯 잠들었다가 다시 나선다는 것이다. 좀머 씨를 두고 '평생을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무언가로부터 늘 도망치듯 쉬지 않고 걷는 사람, 호의도 배려도 청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사람. 좀머 씨는 그런 사람이다.


  좀머 씨의 늘 걷는 행동을 보며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중, 고등학교 때 하루 두 시간씩 걸어 등하교하던 과거의 나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자주 걸었다. 학교에 늦지 않기 위해 충분한 여유를 두고 집을 나섰고, 집에 들어오는 건 늦어도 상관없었지만 따로 갈 곳이 없었기에 더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찾는다고 헤메 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친구들에게는 차비를 아끼려고 그런다거나 등교 시간에 사람이 너무 많아 끼어 타기 싫어서 그런다거나 걷는 게 편하다거나 운동 삼아 걷는다거나 하는 얘기를 이유로 대곤 했는데 모두 맞으면서 늘 그런 건 아닌 이유를 위한 이유에 불과했다. 

 

 늘 걷는다는 이상한 행동 다음으로 마음에 와닿은 건 사람들의 호의를 거절하는 좀머 씨의 태도였다.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소설 속에서는 뚜렷이 밝히지 않는다. 좀머 씨와 대화했다는 사람도, 인사했다는 사람도,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쉬어가더라는 목격담도 없다. 대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잠시 숨을 돌릴 정도의 시간 동안 누웠다 가는 게 전부다. 교류나 대화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단호한 거절. 좀머 씨는 도대체 무얼 거절하려는 걸까.


 처음부터 뭔가를 거절하려 하는 걸 거라 생각한 건 아니다. 오히려 소설에서 얘기한 것처럼 미지의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거라는 데 마음이 쏠렸다. 과거에 겪은 어떤 고통스러운 경험, 상실이나 상처가 된 어떤 사건이 좀머 씨를 두려움에 떨게 하고 한 곳에 멈춰 서거나 쉬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라는 추측이었다. 비슷하다면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때의 나는 그 마음에 공감했다. 늘 도망치듯 살고 있고 더 멀리 도망치고 싶은 기분을 좀머 씨의 모습에 덧 씌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몇 번쯤 더 읽었고 조금씩 다른 면모, 생각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결정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다 이번에 이런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좀머 씨의 늘 걷는 행동은 도망이기보다 거절이 아닐까 하는.


 소설 속 화자는 단 한 번 좀머 씨를 가까이서 봤다고 적었다. 그날 날씨가 지독해서 커다란 우박이 한참이나 쏟아졌고 차 안에 있으면서도 두려울 정도였다. 그런 날에도 여전히 걷고 있던 좀머 씨를 향해 화자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다 죽겠어요."

 화자는 그 말에 '상투적인 표현'이라는 얘기를 덧붙인다. 구원의 손길, 도움의 말, 배려하는 마음이었을 아버지의 메시지는 고작 '그러다 죽겠다'는 상투적인 것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진심으로 걱정하고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호의였더라도 입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은 결국 상투적인 것뿐이었다. 다르게 말할 수 있었을까? 그 상황에 도움을 거절하지 못하도록, 상대에게 이 손길을 거부하지 않도록 강하게 권하는 다른 말을 떠올릴 수 있는가? 최악의 날씨 속에서 밖을 걷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우리는 무슨 말을 건네야 할까. 

"타세요."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군요."

"기꺼이 도와드릴게요.

"부담 갖지 않아도 됩니다."

"어려울 땐 서로 도와야죠."

모두 상투적인 말 투성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새로운 말을 떠올리기는 몹시 어렵다. 상대방이 그 말을 부담 없이 순순히 기쁨 속에 받아들일 거라 확신하는 건 더 어렵다. 할 수 있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건네거나 불편한 마음을 견디며 지나치는 것뿐이다. 


 오늘의 내 마음은 좀머 씨의 공포 어린 표정, '나를 좀 내버려 두시오!'라는 외침이 그 상투적인 표현과 그런 상황에서는 서로 도와야 한다고 말하는 어떤 의미로는 강압적인 사회적 강요를 향하고 있다고 느낀다. 슬픈 일을 겪는 사람에게 "정말 힘드시죠."라거나 "힘내세요."라거나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같은 말을 건네는 건 몹시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런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돌아올 비난을 참아내는 것 또한 두렵다. 그 슬픔이 얼마나 크고, 고통스러운지 짐작할 수 있고, 비슷한 경험이 있어 공감하면서도 그걸 표현하는 순간 진심이 아닌 것 같아질 때가 있다. 정말 이 말이, 이렇게 하는 게 최선일까 하는 의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말조차 하지 않으면 냉담하고 무감각한 사람처럼 여길 것 같고, 이런 흔한 표현으로는 진심을 전하지 못할 것만 같은 두려움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진심을 드러내는 건 몹시 어렵다. 충분한 대화와 함께 하는 시간, 감정의 공명과 공통감각, 서로 침범하지 않는 배려. 상투적 표현이나 조급함이라는 충동을 이기는 인내가 있어야 비로소 진심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우리가 사는 지금, 현재, 이 순간에 이 느리고 복잡하며 섬세한 과정은 가능하며 충분히 흔하게 일어나는 일일까? 그런 일이 흔히 일어나기를 바라며 그런 과정 속에서 늘 길을 잃는 내가 언제나 세 발로 걷는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 


 마음이 길을 잃기 전에, 여기 남긴다. 

그러니 상투적인 마음들이여, 좀머 씨를 제발 좀 내버려 두세요. 

잘 자라는 나무도 좀 내버려 두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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