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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Jul 08. 2024

따뜻한 경제학은 가능한가

사랑, 정말 얼마면 되는 걸까?

경제란 뭘까?

경제는 어디서 왔을까?

사람들도 나라에서도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는 걸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같은 한자를 쓰는 경제(經濟)가 둘 나온다. 

첫 번째는 경세제민,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

두 번째는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생산  분배 소비하는 모든 활동 또는 그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

 내겐 두 번째 의미 앞부분이 더 익숙한데 '사회적 관계'까지 포함한다는 설명에 조금 놀란다(새삼스러워서 잠시 생각이 멈추는 순간을 두고 놀랐다고 할 수 있다면). 사회적 관계조차 경제라는 표현에 '인맥이 스펙'이라던 말도 떠오른다. 마치 이 시대가 인간의 모든 활동의 가치를 경제적 효용에 두고 있는 것 같다는 삐딱한 생각이 떠오르려기에 살짝 돌아간다.

한자의 뜻도 의미심장하다. 經 경은 지나다, 濟 제는 건너다. 한자의 뜻으로 보면 경제란 이름이 지어질 때부터 정체하지 않고 움직이고 흘러야 한다는 의미를 품었나 보다. 

 지금 사람들에겐 더 많은 보유와 소유가 경제력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진정한 경제인, 부자들의 생각은 어떨까? 그 사람들은 조금, 혹은 무척 다를까?


 1819년 영국에서 태어난 존 러스킨은 좀 다르게 생각했다.

 당시 주류 학자나 기업의 평범한 경제 인식을 크게 벗어나는 소위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친 거다. 존 러스킨은 자신의 주장을 바탕으로 한 논문들을 펴냈는데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에 네 편의 논문이 담겼다.  책을 펴낸 출판사마다 다르겠지만 열린책들은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었다. '경제학 최대의 변수는 <애정>이다'라고.


 경제라는 무생물에 애정이 최대의 변수라니 웃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앞서 국어사전에서 찾은 '경제'라는 단어의 의미에서 보듯 경제는 무심하거나 무감정할 수 없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 관계를 통해 일어나는 활동에 어떻게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을 수 있을까. 국가 간의 경제에서는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는 말도 이상하다. 국가 간 경제의 결과는 반드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그런 의미에서의 '애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들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경제적 가치가 인간의 가치보다 앞에 놓여서는 안 된다는 외침말이다. 

 

 짧게 늘어놓은 내 생각들조차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무르다거나 경쟁력이 없다거나 생존하기 어렵다는 식의 걱정과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존 러스킨의 세계, 150년도 더 전의 세계도 그랬다. 오히려 존 러스킨의 사회적 지위, 영향력이 컸던 만큼 비판의 수위는 높았고 거셌다. 경제는 효율, 최대 이익과 최소 손실, 당시의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 할 만큼의 전성기를 누리며 발전을 거듭했으니 비판하며 발목 잡으려는 듯한 말참견이 듣기 좋았을 리 없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존 러스킨의 <악마의 경제학> 대신 <인간의 경제학>을 추구하자는 주장을 함축하는 말이다. 책에서는 이런 예를 든다.

 어떤 농장의 주인이 아침에 나가 농장 일을 할 사람을 모은다. 오늘 하루 일당으로 15만 원을 약속한다.
그에 응한 사람들이 일을 시작한다. 점심시간에 주인이 농장에 나가보니 지금 속도로는 일을 다 못 끝낼 것 같았는지 다시 나가서 아직 일을 찾고 있는 사람을 더 데려온다. 그 사람들에게도 반나절 임금으로 15만 원을 약속한다. 오후 세 시쯤 되어 주인이 다시 나가보니 몇 명만 더 있으면 오늘 일이 아주 깔끔하게 끝날 것 같다는 생각에 다시 밖으로 나가 그때까지 일을 찾고 있는 사람을 몇 더 데려온다. 그리고 일이 끝난 후 일당을 주는데 아침에 온 사람에게도 15만 원을, 점심에 온 사람에게도 15만 원을 오후에 온 사람에게도 15만 원을 주는 것이다.
 이걸 본 아침에 온 사람들과 점심에 온 사람들이 주인에게 따져 묻는다. "우린 더 많은 일을 했는데 더 늦게 와서 조금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과 같은 보수를 주는 거요?" 그러자 따져 묻는 이들에게 주인이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처음 당신들을 고용할 때 약속한 임금을 다 줬는데 무슨 상관인가?"  
 "내가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 먼저 온 사람과 같은 돈을 준다고 해서 먼저 온 당신들에게 어떤 손해가 생기는가?"

  상황은 다르지만 이와 닮은 소식을 흔히 뉴스에서 본다. 먼저 왔으니, 더 많이 일했으니, 당연하게도 더 많은 혜택과 보상을 누려야 한다는 생각. 사실 나였어도 좀 억울한 기분은 들었으리라. 뭔가 나도 더 늦게 올걸 하면서 운이 나쁘다고 생각했을지도. 하지만 그런 억울함, 상심은 정말 정당한 걸까?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이제는 정치적 논쟁의 주제가 되어 누군가에겐 분노의 스위치처럼 되어버린 이 말은 존 러스킨이 논문 담은 주장과 같은 맥락에 있다. 너무 당연하게도 기회는 평등한 게 맞다. 다만 기회가 평등할 수 없을 뿐이다. 우리가 살리려는 경제는 재화와 사람, 관계까지 저울질한다. 우리의 시작이 모든 면에서 평등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몽상가라 놀림당할지도 모른다.


 존 러스킨을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한다. 하지만 존 러스킨의 사상은 모두가 동일하거나 일률적 평등을 누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앞서 예를 들었던 것처럼 '일하려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얘기했으며 그 기회가 평등해야 한다는 주장인 거다. 오히려 일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감옥에 보내라는 식으로 나태하거나 게으른 사람에게 냉정한 면모도 보인다. 노동자끼리 서로의 살을 깎아 임금 할인 경쟁이나 더 긴 노동으로 내몰리지 않게 해야 한다는 '더 나은 인간의 삶을 위한 경제학'을 꿈꾸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존 러스킨은 평등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도 평등을 이야기한다. 신체, 성별, 나이, 경제력, 환경.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우린 평등하지 않은 출발점에 서 있다. 존 러스킨의 평등은 경제학이 따뜻한 마음, 인간의 경제학을 지향하는 데서 시작하는 갈등 하거나 다투거나 덜 주고 더 일 시키거나 하는 착취 하거나 착취당하지 않을 평등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나는 나중에 온 사람일까. 아니면 먼저 온 사람이 되어 있을까. 

 충분한 돈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얼마큼 가져야 충분한지 모르겠다. 사실 충분하다는 생각조차 사람마다 다를 텐데 충분한 돈이나 소유에 대해 얘기하는 의미도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예전에 읽었던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속 시간을 훔쳐가는 대신 돈을 주는 회색 신사가 지금만큼 바쁜 시대가 없을 거라는 생각은 든다. 

 더 많이 벌기 위해 더 오래 일하고 아이들을 위해 돈을 더 벌기 위해 더 오래 일하고 더 바빠지고 바빠서 아이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거나 처음부터 아이를 생각하지 않는 시대. 그 소설 속 장면들이 지금보다 더 현실 같은 날이 있었을까.


 이게 다 경제학이 사람의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지 싶다.

 처음 경제는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베풀거나 나누는 게 아니라 가진 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걸 다른 사람의 가진 것과 바꾸는 데서 시작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더 많이 빼앗아서 이익을 보거나 속이거나 노예로 만들어서 부리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는 그게 더 나은 길이었을 것이고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금을 사랑해 자신의 손이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만들 수 있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었던 미다스 왕처럼. 경제와 경제학이 처음의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린 게 아닐까.


 나중에 온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보다 더 나중에 올 그 사람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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