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망과 희망과 폭망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만약 내가 소설을 쓴다면 그 이야기는 내 목소리를 닮아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단순히 생각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 내지 못하는 내 목소리를 소설 속 인물이 대신해서, 호소력 짙고 전달력 있게 내줄 거라 믿었다. 그래야만 한다고, 그래야 소설에 의미가 있다고 못 박았다. 스스로 자신을 너무나 잘 알기에 소설 속 인물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는 일 같은 건 간단할 거라고 생각했다. 완전한 이해자. 도플갱어. 하지만 둘이 만나더라도 누구도 죽거나 다치지 않는 관계가 소설 속에서는 가능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도플갱어 전설처럼 나와 같은, 완전한 나인 이야기 속 인물은 자꾸 현실의 나를 해치려고 들었다. 사실은 스스로가 자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자꾸 알아차리게 했다. 나를 가장 모르면서 스스로를 가장 잘 안다고 믿는 나와 마주 서게 했다. 그러면서 "그런 건 내가 아니다."라고 스스로를 부정하게 했다. 두 번 부정하고, 세 번 부정하고, 진심이라 믿던 지나간 마음이 기만이었거나 도피였다는 걸 인정하라고 다그쳤다. 그런 건 내가 쓰고 싶던 소설이 아니었으므로 결국 선택한 건 글에서 멀어지기였다.
너무 당연한데 최근에야 이해하게 된 일이 있다. 예전 티브이에서 흔히 본 "내 얘기를 소설로 쓰면 몇 십 권은 될 거다."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이야기가 왜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풀렸다는 얘기다. 아마도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자신이 겪은 기구한 이야기를 시간 순으로 혹은 기억 순으로 주욱 나열했을 것이다. 서사가 있는 이야기라기보다 연대기가 되었을 그 사연들은 혹시 누군가 기록했더라도 소설이 아닌 자서전 혹은 전기로 남았을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 목소리로 낸다는 건 다른 사람의 이해나 공감을 떠난 독백, 혼잣말이나 다름없다. 최근에야 소설은 그런 혼잣말과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독자로 지내온 시간이 그리 짧지 않음에도 그 차이를 모르고 지낸 것이다.
이게 맞다거나 절대적이라는 건 아니지만 지금 내가 생각하는 소설이란 들을 수 없는 이의 목소리를 듣는 일, 확실하지 않아서 어느 쪽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건 혹은 사람의 이야기를 어느 한쪽에 서서 상상해 보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현실에서는 확신이 없다거나 자신이 없어서 할 수 없는 얘기, 내놓을 수 없는 결론, 상상할 수 없는 배경들을 소설에서는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현실에서는 어느 쪽인지 자꾸 헷갈리던 내 마음이 다른 사람, 다른 세계의 목소리를 내보는 과정에서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얘기다. 전혀 모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혹은 아주 오래전 존재했던 다른 사람의 얘기를 하는 동안 불확실하던 내 마음이 또렷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게 소설 쓰기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누구나가 소설 쓰기를 시작해야만 한다. 가장 확실하다고, 이게 분명하다는 스스로의 믿음과 확신에 배반당했을 때 들이닥치는 충격을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삶을 사는, 저마다 수십 권 분량의 소설에 해당하는 사연과 슬픔, 아픔, 기쁨, 행복을 품고 있는 모든 마음들에 목소리를 허락해야 한다.
예를 들면 매일 보던, 몇 년이나 지나던 어떤 풍경이 새삼 낯설거나, 정겹거나,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지거나, 싫어진 이유 같은 게 궁금해졌을 때 늘 그 자리에 붙박여 있는 어느 건물 벽의 그림 속 소나무의 이야기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늘 저 자리에서 서쪽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그림 속 소나무에게 목소리가 주어진다면 무슨 얘기를 들려줄까. 그 이야기가 내게서 나온다면 재밌는 게 될까 역시 재미없이 그칠까. 누군가 공감하거나 이어받는 이가 생길까 오히려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사람을 만나 놀라게 될까. 내 목소리 그대로라면 두려울 그 공감의 무게 혹은 거부의 고통을 그림 속 소나무가 나누어 짊어진다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무언가가 보이거나 떠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선생님은 도피처여도 좋다고 하셨다.
도피함으로써 마주할 수 있다는 얘기였을까.
그랬다면 분명 맥이 통한다.
막연히 지망하다가 근거 없는 희망을 품었다가 폭망 해서 좌절하던 일이 왠지 우습다.
막연한 희망에 좌절하는 가벼움이란 얼마나 볼품없는가. 간절하지도 않았으면서 좌절했다고 하면 더 부끄럽다. 얼마나 많은 소설가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는지 상상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논다.
소설에는 놀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소설은 내가 노는 공간이어야 한다.
논다는 말에 붙일 수 있는 해석은 여럿이겠지만 분명 짓눌릴 만큼 몹시 무겁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잘 쓰고 싶은 마음과 잘 써야 한다는 부담은 다른 말이다.
아기가 세상에 나와 말을 익히고 처음 의미를 담아 말하기까지 걸리는 시간, 들이는 노력을 생각하자.
이름 없는 글쓴이가 무슨 대문호처럼 두려움에 벌벌 떠는가 말이다.
차가워지는 만큼 가볍게 높아가는 가을 하늘과 구름처럼.
매일 건너던 다리 위를 떠가는 구름의 속도가 저마다 다르다는 걸 새삼 알아차리고 한참 바라보게 되는 것처럼, 다만 흐름에 맡기는 일. 지금은 그 생각만 하기로 하자.
우연일까, 구름이 닮았다.
내가 쓴 글, 남긴 이야기가 나를 닮았다고 느꼈다면, 그건 우연이다. 글 속엔 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