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법을 잊어버린 우리에게
별 일 아니어도 우는 아이가 있습니다.
슬퍼도 울고, 아파도 울고, 서러워서 울고, 억울해도 울고, 기뻐도 우는 아이.
말 대신 쏟아지는 눈물에 지친 아이는 언제부턴가 '울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하고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오랜 기도에도 눈물은 간단히 멎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자라서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했지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는 바보처럼 보이는 울보인 나. 아이는 그런 자기가 진저리 날만큼 싫어졌다가도 눈물은 인간성의 증명이라는 어떤 책에서 본 문구를 떠올리며 위안을 얻곤 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이루어지지 않던 마음의 기도는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순간에 이루어지고 맙니다.
함께 살던 외할머니가 어느 새벽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날부터 장례가 끝나는 날까지 한 줄기는커녕 한 방울 눈물도 흘리지 않았던 거예요. 왜 눈물이 나지 않는가. 왜 울컥하지 않는가. 왜 울지 못하는가. 대답은 어디에서도 오지 않았습니다. 가족의 죽음에도 아랑곳 않는 패륜아처럼, 장례 내내 우두커니 섰다가, 어슬렁거리며 왔다 갔다 하다 함께 지내던 집으로 혼자 돌아왔을 뿐이죠. 그 후로도 하루, 일주일, 한 달이 넘게 눈물이 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이 죽어버린 줄 알았습니다. 이대로 영영 눈물 흘리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후 처음 읽은 책이 바로 『눈물 상자』예요.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흰』은 벌써 한참 전에 읽었지만 다시 읽어볼까 하던 때 책방에 오신 손님들이 호기심을 갖기에 먼저 펼쳐보게 됐지요.
『눈물 상자』는 시도 때도 없이 내내 우는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온갖 이유로 소녀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죠. 엄마는 걱정하고, 아빠는 화를 내며, 친구들은 함께 놀아주지 않고 놀리기만 합니다. 소녀는 늘 소리내거나 소리 없이 울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의 마을에 눈물을 모으는 사람이 찾아옵니다. 손에는 다양한 눈물이 든 상자를 들고요. 눈물을 모으는 아저씨는 순수한 눈물을 찾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소녀에게 특별한 눈물을 가지고 있으니 그 눈물을 좀 보여달라고 하죠.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늘 흐르던 눈물이 아저씨를 만나고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아저씨는 기다릴 수 있다고 말하고 소녀는 다른 볼 일이 있어 다녀오겠다는 아저씨를 따라나섭니다. 가족도, 고향도 두고요. 『눈물 상자』는 그렇게 시작하는 동화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 속 소녀는 한강 작가 본인처럼 읽힙니다. 비극적인 사건, 그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 해소되지 않는 의혹,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 풀리지 않는 슬픔들을 마주하며 쓰는 내내 눈물 흘린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어쩌면 무관심한 사연을 이유로 긴 밤과 온 낮을 울며 보낸다는 얘기를요. 하지만 이런 생각이나 해석은 나중에야 떠오른 부수적인 것이었습니다.
처음 읽으면서 떠올린 건 어린 날의 내 모습이었습니다. 늘 우는 울보. 다른 게 있다면 울게 되는 거의 모든 이유가 자신에게 달려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세계의 슬픔이나 주변의 삶들을 이유로 울게 된 건 더 나중 일,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요. 나의 슬픔, 아픔, 분노, 분개, 억울함, 서러움들에 늘 휘둘렸습니다. 당당하게 맞서거나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하고 분한 눈물을 흘린 날이 얼마나 많았는지.
앞서 적은 '울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가 이루어진 이후에는 늘 겁내며 지내야 했습니다.
"사람이 참 모질다."
"사이코패스인가."
"공감 능력이 왜 이렇게 떨어져."
모두 부정하고 싶은, 사실이 아닌 말들이었지만 증명하기가 어려웠어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그렇게 못 미더운 존재가 되는 거였습니다. 경계하거나 경멸하거나, 나쁜 의미로 경원하는.
『눈물 상자』 표지에는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다 읽고 그 문구를 다시 보는데 '당신을 위한 동화'로 바뀌어 읽히더군요.
세상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있는지, 얼마나 많은 이유로 눈물 흘리는지.
마치 오래전 나처럼 사람이라면 당연히 눈물 흘려야 하는 순간에 울지 못하는 슬픔이 얼마나 큰지. 짐작하기 어려운 그 현상의 이유가 어쩌면 동화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이 거듭거듭 솟아났습니다. 여전히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이제는 다른 많은 이유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었으므로) 오래전 내가 위로를 받는 느낌에 어쩐지 홀가분한 기분이 됐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기가 찾아올 수 있다는 것.
우는 어른보다 울지 않는 아이들이 더 이상하다는 것.
어른들의 우는 이유보다 아이들의 눈물을 막고 있는 것이 어떤 마음의 작용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할 아이들의 마음이 마치 죽어가거나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 얼마나 슬픈 건지 실감해야 살려보든지 녹여보든지 할 것 아니겠어요.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더 많이, 더 쉽게 울었으면 좋겠습니다. 품위나 체면보다 평판이나 놀림보다 마음의 홀가분함과 개운함이 더 소중하고 눈물이 흐른 자리를 따라 찾아올 공감의 시간이 몹시 귀하니까요.
운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울어보세요. 생각보다 많은 게 달라진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우는 법을 잊었다면 가깝거나 멀리 있는 아기들을 보세요.
이유? 그런 것 없어도 그냥 울어요. 생각보다 먼저 울음이 나와요.
그러니까 너무 생각 말고 울어요. 울고 나서 생각해요.
그러면 좀 나아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