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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Dec 01. 2024

마을의 마음

사람 마음도 모르는데 어찌 마을의 마음을 알겠습니까마는

2024년 11월의 마지막 날 일입니다.

오후에 나가니 상점 뒤편 골목 풍경이 또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어제까지 있던 건 사라지고 어제 보지 못한 잔해가 공터 가득 쌓여있더군요. '한 채가 더 헐렸구나'하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는데 웬걸요. 한 채를 더 헐고 그 뒷집도 반 넘게 부순 뒤입니다. 

 한 채는 한참 전에 지붕을 벗기고 창틀이며 문틀에서 쇠로 된 건 다 뺏겼어요. 비도 맞고 첫눈도 맞고 축축이 젖어서 헐릴 때 먼지는 덜했겠네요. 아마 사람으로 비유하면 조용한 임종이었을 겁니다. 지키는 사람도 보거나 듣는 사람도 없이 홀로 땅 위에서 지워지는.


 전에는 '또 집을 헐어버리네'하고 툴툴 거리기도 했는데 지금 헐리는 집들을 보면서는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사람이 살기 힘든, 너무 낡은 집이구나'하는 가벼운 끄덕임. 납득하는 마음이 앞서더군요. 

 '쓰러질만했지.'

'헐어버릴 만도 하지.' 하는 사람의 마음.


 이런 상상을 합니다.

만약, 이 마을의 집들에게도 마음이 있다면. 

목소리가 있다면 지난밤 저들끼리 무슨 말들을 나누었을까.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소문으로만 돌던 얘기.

"여섯 채가 헐린댜."

"처음도 아니고 전에는 안 그랬간?"

그러다 길 옆 공방집이 헐리고 난 새벽부터는 소문대로 여섯 집이 헐릴 거라고, 다음에 헐릴 집이 누구네인 줄 아느냐며 서로 궁금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루하루 지나서 삼 주나 조용히 보낸 뒤에는 올해는 그만하려나보다 하고 안심했을지도요. 

 11월 18일 이른 새벽, 해뜨기도 전에 육중한 포클레인 소리에 마을은 잠에서 깨어났을 겁니다. 그리고 알았을 거예요.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여섯 채가 헐릴 거라는 소문이 더 이상 소문이 아니라는 걸요. 올해가 가기 전에 현실이 될 거라는 걸요. 남은 건 다음에 누구네 집이 헐릴까 하는 순서의 문제. 누구네 집이 조금 더 오래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것인가 하는 시간의 문제라는 걸요.

나태주 시인의 시가 적힌 담장

  11월 마지막 날 헐린 집 담에는 나태주 시인의 시가 세 편 적혀있었습니다. 그중 가운데 적힌 시 제목은 얄궂게도 「묘비명」입니다. 짧은 시인데 이렇게 시작하고 끝이 나요.

「묘비명」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자

-나태주-

'많이 보고 싶'어 하는 존재가 누구인지, '조금만 참자'고 하는 존재가 누구인지 알겠다고는 못하겠습니다.

다만, 이 마을과 골목에 함께 했던 집들이 서로 얘기를 나눈다면 먼저 사라지는 집을 향해, 남겨진 집들에게 그런 말들을 주고받지 않았을까. 조금만 참자고. 서로 조금만.


 이 골목을 가득 채운 집들은 유난히 서로 붙어 있었어요. 담장은 당연히 성벽처럼 이어져있고, 벽하나를 두고 한쪽은 부엌, 다른 한쪽은 화장실인 일도 흔했습니다. 오죽하면 물받이를 한 번에 이어 설치했겠어요. 3, 40년 혹은 그보다 오랜 시간 서로 의지하고 지탱하던 이웃을 잃은 집의 마음을 '사람이 살만한 집은 아니네'하고 '헐릴만하다' 생각하는 사람이 짐작이나 할 수 있겠어요. 


 좁다란 골목을 가득 채웠을 제각각인 사람들의 소리.

그 사람들의 고된 하루 끝 휴식처이자 안식처가 되어주었을 집들.

사람도, 집도 하나 둘 잃어가는 마을의 마음.


골목 초입 갈림길 담에 나란히 적힌 나태주 시인의 시, 「그래도」와 「묘비명」.

「그래도」

나는 네가 웃을 때가 좋다
나는 네가 말을 할 때가 좋다
나는 네가 말을 하지 않을 때도 좋다
뾰로통한 네 얼글 무덤덤한 표정
때로는 매정한 말씨
그래도 좋다.

-나태주-


 이 골목은 나태주 시인님도 자주 오가던 길일 거예요. 

자기 이름이 붙은 '나태주 골목'에 공터가 늘어가는 모습과 시가 적힌 담장이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이 빠진 어린아이 같아지는 풍경을 지나게 되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오늘 이후로 아주 오래 공터로 남을 이 자리를 '그래도 좋'아할 수 있을까요.


 사람의 마음도, 마을의 마음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없지만 오늘 이후로 이 골목을 지난다면 도무지 '그래도 좋다'고 할 수 없다는 내 마음만은 잘 알겠습니다. 차라리 허름해도 좋으니, 골목으로 지금 풍경으로 마을이 조금 더 오래 남아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이 마을을 개발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이 집들을 헐고 공원을 만들기로 결정한 사람의 마음과 여기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서 떠나버린 집들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그때까지 매일 조금씩 참으며 오래 기다린 집들에게 이야기 건넬 수 있다면 오늘이 슬픈 마을의 마음에 조금의 위로가 될 수 있을까요. 

 그날에 오히려 홀가분하다며, 충분하다며 소리 없이 흔들릴 남겨진 집들의 마음이.

네 번째 집이 헐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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