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천재 작가의 신세한탄
작가가 써야 하는 글은, 작품은 무엇일까.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것'일까.
요즘 '유행하는 것'일까.
세상이 '관심 갖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 수밖에 없는 것'일까.
혹은 그 모든 것일까.
어떤 작가에게 이 질문을 해도 비슷한 반응이 돌아올 것이다.
"뭐, 쓸데없는 걸 묻고 있어?" 하는.
읽는 사람에게 이렇게 묻는 거나 다름없다.
"어떤 글을, 작품을 읽어야 할까요?"라고.
대답은 제각각 일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책을 소개하거나, 이미 유명한 작가 혹은 작품을 읽는 게 좋겠다는 대답.
어차피 돌고 도는 것, 소장하고 있는 걸 먼저 읽으라거나 가까운 도서관에 가보라는 추천.
읽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니 직접 읽기보다 책 읽어주는 유튜브를 보는 게 낫다는 말까지.
'단군 이래 최대 불황'
도서 출판계에서 제법 유명한 말이다. 책을 읽는 사람이 줄었다거나 더 이상 책을 사지 않게 되었다는 기사나 통계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문장이기도 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꼭 뒤에 이어지는 문장이 하나 더 있다.
'도서 출판계는 한 번도 불황이 아니었던 때가 없었다'는 표현이다.
형편이 더 나은 나라, 우리보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사는 나라에서도 도서 출판계는 늘 불황이라고 한다.
아이러니한 건 '지금이 기회'라거나 '책을 쓰면 성공'이라는 얘기 역시 동전의 뒷면처럼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항상 불황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언제나 기회라고 하는 묘한 장면.
만약 이 장면이 영화 속에서 펼쳐진다면 불황을 이야기하는, 자신의 독특한 문체와 천재적 작품이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며 한탄하는 인물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다양한 모습, 형편, 말을 하는 인물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최근 읽은 책의 작가 본인이 분명한 이 사람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이 드물 것만 같다.
그 작가 이름은 '루이페르디낭 셀린', 소설의 제목은 <Y교수와의 대담>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부터가 작가에게는 비극이다. 다행히 한국인이 아닌 데다 고인이 된 지 60년도 넘었기에 그의 신세 한탄의 이유 중 하나가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도서관에 들른 길에 책을 한 권 빌려가자고 마음먹었을 때 무슨 변덕인지 '아무도 읽지 않은 것 같은 책을 골라보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당연히 아무도 읽지 않은 듯 새책 같은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떠오른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서 고른 책이 <Y교수와의 대담>인 거다.
예상대로 읽기가 쉽지 않았다. 첫 문장을 읽을 때만 해도 무척 공감 가는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데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마음은 무거워지고 읽는 속도는 더뎌졌다. 뭘 말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는데 도무지 왜 이렇게 정신 사납게 구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약 여기까지 읽은 이가 있다면 당신은 진정 엄청난 인내심의 소유자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Y교수와의 대담>은 작가의 책을 출간해 줄 출판사의 대표,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의 가스통 갈리마르를 만족시킬만한 일을 하려는 셀린의 시도에서 시작한다. 셀린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만한 사건을 만들어서 책 판매를 부추기겠다는 계획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스통은 최소한의 일이나마 하는 것처럼 굴지 않는다면 자신이 죽을 때까지 책을 내주지 않을 냉정한 장사꾼이다. 결국 가스통 갈리마르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해내야만 하는 일이 바로 인터뷰인 것이다. 적당한 인터뷰어를 찾다가 고른 사람이 바로 Y교수인데 은퇴 교수인 Y 교수 역시 가스통에게 원고를 맡긴 작가다. 비슷한 처지의 두 사람이지만 상황은 좀 다르다. 셀린은 곧 굶어 죽을지도 모를 절박한 상황이지만 Y교수는 퇴직 연금을 수령하고 있어 형편이 좀 낫다. 하기 싫은 인터뷰를 하는 인터뷰이나 인터뷰하는 상대방에겐 관심이 없고 소변을 참느라 진땀을 흘리는 인터뷰어나 상황이 엉망진창이라 제대로 된 인터뷰가 될 수가 없다. 소설은 산으로 가서 셀린은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을 적대하며 비난하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Y교수는 참지 못하고 싸버린 오줌의 웅덩이에 앉아 있게 된다.
보통 책 이야기를 할 때 자세한 줄거리나 결말을 적지 않는다. 다음에 그 책을 읽게 될지도 모를 독자에게 선입견을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인데 이번엔 결말까지 적었다. 이유는 이 소설에서 중요한 건 내용이나 표현이나 결말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다. 심지어 이 170페이지 정도 분량의 소설은 한 줄로 요약 가능하다.
이렇게.
"내가 뭘 잘못했는데?"
<Y교수와의 대담>에서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셀린은 자신을 발명가, 무명 발명가, 작은 발명가, 사소한 기법이라며 메시지의 전달에 치중하는 모든 글들, 작품은 '졸작'이고 감정의 전달이 가능한 자신의 문체가 더 우월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졸작'만 찾아 읽고, 비슷한 '졸작'이 거듭 출간되고 가스통 갈리마르 같은 출판인들도 진짜 작품이 아닌 돈이 되는 것만 잔뜩 찍어낸다고 하는 거다. 이슈를 만들어 몰고 다니는 이슈메이커가 인기 작가가 되는 판, 공쿠르 상도 노벨문학상도 모두 진짜를 알아보지 못하고 '졸작'들만 띄워주는 세계. 감옥에 다녀오지 않고 자유를 이야기하고, 좋은 것은 서로 베끼기를 주저하지 않는 속물들. 잘못된 걸 잘못이라고 하고 졸작을 졸작이라고 하고 속물을 속물이라고 하는 게 뭐 잘못이냐고 하는 감정의 난무.
작가는 무엇을 두려워할까.
외면하는 독자를, 독설을 쏟아내는 평론가를, 자기 검열에 시달리는 자신을, 혹은 그 모두를.
자신의 정치적 노선이나 신념을 작품에서 드러냈을 때 받게 되는 비난이나 혹독한 처분은 어쩔 수 없거나 참고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 같은 것일까. 이 작가가 왜 이렇게 세상에 날을 세우고 있는가는 표지 날개에 적힌 짤막한 작가 약력만으로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2차 대전 시기 '반유대주의를 공공연히 표명', '대독 부역자로 단죄', '덴마크 감옥 수감', '자신이 마주한 모든 주의에 대해 비판', '문단과 강단으로부터 철저히 외면'.
살아서는 인정받지 못한 빈센트 반 고흐와 동일 선상의 존재로서의 나.
작가의 세계, 내면, 작품을 두루 살펴보면 다른 결론이 나올지 모르지만 한 권의 책을 단 한 번 읽었을 뿐인 내겐 싸우다 지쳐서 정신이 나가버린 한 작가가 부르짖는 외침만 들릴 뿐이다. 나를 좀 알아보라, 내 작품을 좀 들여다보라, 너희가 잃어버린 가치로 돌아가라, 사라지기 전에 좀 챙겨달라, 잃어버린 낭만, 사람의 마음, 감정을 다시 살려보라. 흥미진진한 가십거리, 유의미한 메시지, 넘쳐나는 자극에서 그만 벗어나라.
들렸을까? 그의 외침이, 누군가에게는.
어떤 작가들을 본다.
살아서 무명으로 철저히 외면당하다 죽어서, 죽은 지 십수 년도 더 지나서 주목받고 찬사 받는 작가들을.
그렇게 좋아할 거였으면, 앞다투어 찾아 출간하고 읽을 거였으면 좀 일찍 좋아해 주지 그랬을까.
셀린의 시대는 상상할 수 없었을 뉴스와 메시지로 넘쳐나는 우리 세계.
그때나 지금이나 도서 출판계는 유례없는 불황을 지나고 있는데, 무엇을 쓰고 무엇을 읽어야 하는 걸까.
문득 쓰는 사람의 마음이 되어 오래 도서관 서가를 떠나지 않을 책을 생각한다.
오늘은 <Y교수와의 대담>, 도서 반납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