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슬픔들, 슬픈 예감들에 대하여
어제 아침 문득 철없는 스무 살로 돌아간 기분을 느꼈다.
지난달 만 네 살이 된 아이 옆에서 눈을 뜬 아침이었다.
응당 부모라면, 아빠라면, 어른이라면 하는 소리 뒤에 이어질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밤과 새벽을 보내고 짧은 잠을 잔 뒤였다. 웹툰이니 웹소설을 읽다 날이 밝은 걸 보고서야 잠에 들었다. 얼마나 철없는 짓인가.
금요일 밤도 아니고 목요일 밤에 내일의 일과와 육아를 준비하지 않고 시간을 낭비하다니.
시간을 아끼는 게 좋은 줄 알면서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득 없는 반항심처럼 오히려 더 낭비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아직까지는 자신의 체력을 믿는 구석도 있다. 하루나 이틀 정도는 좀 덜 자도 괜찮다는 방심.
아빠가 된 지 만 4년이 지났지만 아직 아빠라는 자리가 익숙해지지 않는다. 매일 자라는 아이가 주는 즐거움과 힘겨움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매일 고마움과 어려움이 생겼다가 지나간다. 사건에는 익숙해지지 못하지만 지나갈 거라는 믿음에는 익숙해진다. 시간이 있다면, 시간만 있다면, 익숙해지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다.
밤새 쏟아붓던 비가 그친 아침, 책방 나가는 길에 멀리서부터 눈에 들어오는 모습이 있었다. 마치 밤새 그 자리에 앉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의 시간만 멈춘 것처럼 반듯한 자세로 앉은 모습.
담미다.
익숙한 모습과 익숙해지는 일 없이 언제나 반가운 마음.
언제까지나 반가운 마음이 익숙함으로 무뎌지지 않기를 바란다.
넷이 붙어 다니던 담미 일행이 둘로 줄었다.
메롱 이라고 부르던 아이가 먼저 모습을 감추더니 막내였던 사만다도 보이지 않은 지 한 달이 넘었다.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그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기다리기를 그만뒀다. 대신 남은 고양이들을 만날 때마다 더 반가워하려고 한다.
무뎌지지 않기 위해.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충분히 추억하기 위해서.
담담해지는 건 무심해지는 것 같아서 싫다.
어른처럼 '그런 일이 처음도 아니고 늘 그런 것이지'하며 슬픔에 마음 쓰지 않기 위해 다른 데다 마음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자꾸 용기를 잃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제는 새로 나타난 길고양이에게 이름 짓는 일도 그만두고 말았다. 가끔 아이가 묻는다.
"아빠, 얘는 누구예요?"
늘 만나는 고양이들마다 "응, 걔는 담미고, 쟤는 치즈고, 저기 차 아래 있는 애는 사만다야. 저 멀리서 눈치 보는 애는 그미, 궁그미고."하고 이름을 알려주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길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여 부르는 데 익숙해졌으므로 아이는 자꾸 이름을 묻는다.
"응, 얘는 아빠가 부르는 이름이 없어." 하고 알려주고 만다.
전에는 그냥 듣더니 요즘에는 아이도 자꾸만 이름을 붙여 부르려고 한다. 다만 아직까지는 볼 때마다 이름을 바꿔 부르므로 이름이 되지 않는다.
이름이 없는 데 익숙해지는 게 낫지 않을까?
잘 모르겠다.
이름 없이 부르는 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용기를 잃어서, 겁이 나서, 슬픔이 더 커질까 망설여져서 이름 짓지 않는 게 더 나은 걸까.
책방 앞 화분의 꽃이 피고 지고 또 핀다.
꽃의 색깔을 닮은 희고 노란 고양이가 밥을 먹는다.
그릇이 세 갠데 그중 꼭 납작한 가운데 그릇에서 먹는다.
그 자리가 내 자리라는 듯, 여기가 가장 익숙하다는 듯.
담미와 치즈와의 나날이 익숙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여전히 호기심 많은 궁그미와 드물게 만나서 가끔 이름도 잊는 다정이와의 나날도.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만난 시간만큼 긴 시간까지 기억하겠다는 약속은 어렵지만 간단히 부재에 익숙해지지 않겠다고 혼자 다짐한다.
왜 하필 공주에 정착했느냐는 물음에 "고양이들 때문에요."라고 답한 적은 없지만 공주에서 느낀 포근함과 아늑함에 고양이들이 들어있으므로.
공주에 사는 동안은 언제까지나 되도록 오래.
익숙해지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