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내는 미덕일까
참는 게 미덕인 세상이다.
지금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진 듯한데 여전히 웬만하면 문제를 키우지 않고 참는 게 서로를 위한 거라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다.
'저 상황에는 뭔가 이유가 있겠지.'
'어지간히 급했나 보군.'
'나쁘기만 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나도 그런데.'
'이건 좀 심한데? 뭐 귀찮은데 지나가자.'
습관처럼 혼잣말을 하고 있으면 투덜거리는 소리가 됐는지 옆에서 뭐라고 한마디를 한다.
"좋은 일도 많은데 늘 화를 내고 있느냐. 그건 당신에게도 좋지 않다."는 좋은 말이다.
'그래, 좋은 생각을 하는 게 낫지.'
'좋은 걸 더 많이 보려고 하는 게 좋지.'
그런데 내가 잘못된 건지, 세상에 워낙 비슷한 일이 많은 건지 도무지 어디를 봐도 문제가 보이는 걸 어떻게 할까. 작고 사소한 문제부터 심각한 문제까지 다들 신기할 정도로 잘 참고 넘어가는데 오히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더 놀랍다.
'나는 참을성이 없는 걸까.'
이걸 두고 반성한 날도 많았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건데. 괜히 말 꺼냈다가 시끄러워지면 오히려 더 귀찮고 괴로우니까 그만 두자.'
'좋은 걸 보자. 좋은 생각을 하자. 그 원형적 사고인가 원영적 사고인가. 긍정긍정.'
노력 덕분인지, 귀찮음 때문인지 전보다는 분명 화가 나는 일이 줄었다. 하지만 더 나아졌다는 느낌은 없다.
참고 넘어가는 것,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 불화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사는 것, 경적이나 고함이나 지르지 않는 것,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 그러면 정말 세상은 저절로 나아질까. 내가 사는 주변은 더 안전해지고 완전해질까. 적응하는 동물인 나는 도무지 그렇게 자연스러운 개선을 꿈꿀 수가 없다.
불행에도 행복에도 적응하는 존재, 인간
인간은 대부분의 자극에 적응한다. 심지어 통증에도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게 된다. 환경은 말할 것도 없다. 편리함? 이미 충분히 편리하므로 더 이상 나아지거나 발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미 적응한 편리함은 불편함에 한 없이 가까워진다.
나쁜 상황은 어떨까.
우리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말이 있다. 작은 걸 훔치다 보면 큰걸 훔치게 된다는 건데 별 것 아닌 익숙한 속담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심리적으로 도둑질에 적응하는 것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 상황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진다는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도둑질을 하겠어?' 하는 생각이 오히려 맹점이 되어 사람이 많은 곳에서 일어나는 절도도 있다. 적응은 이렇게 편안함을 주지만 불의의 기습, 공격에 취약해지는 약점이 되기도 한다.
최근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간 도로는 벌써 예상했던 문제에 시달리는 중이다. 인도 연석이 낮은 부분에 주차나 정차를 하는 차가 생겨난 것이다. 지금의 형태로 도로를 고치는 걸 보고 당연히 일어날 일이라 예상했으므로 오히려 시에서 이렇게 쓰라고 유도한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도 했다. 차가 회전해서 들어가는 불편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운전자의 시야와 보행자의 시야 모두가 가려지는 불행한 교차점에서 일어날 사고는 누가 책임질 수 있나.
아직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는데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는 사람도 있다. 잘 알겠지만 사고가 일어난 뒤 대처하면 아무리 좋은 대처도 최선은 아니다.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서로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게 맞지 않을까.
계속 참다 오늘 기어이 국민신문고에 신고를 했다.
차를 세운 사람의 사정이 어떤지 몰라서 안타깝지만 도로를 이런 모양으로 돈을 주고 고치는 지자체를 향한 화를 더는 참을 수가 없다. 주차 공간으로 활용하던 공간을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단 높은 인도로 만들고 나무 한 그루 심지 않은 지자체의 방만하고 안일한 행정에 대한 화풀이로 국민신문고를 켤 것이다.
오히려 지자체는 세수 확보가 가능하다며 기뻐할까?
지금은 교회에 다니지 않지만 외할머니 영향으로 교회에 오래 다녔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충격적인 가르침이 있는데 예수님의 말이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라고 하는 말.
구원과 사랑을 주러 온 줄 알았더니 종교 기득권들의 행태를 비판하며 이익을 해치는 행보를 이어가니 미워하는 사람이 생겼을 것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과 갈등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 화평보다 먼저 불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가족 중에도 서로 의견과 믿음이 달라 다툼이 생겼을 거고 그로 인한 갈등이 작지 않았을 것이다.
뭐, 사람들은 누구나 유리한 말을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가져다 쓰기 마련이므로 나도 써본다.
내가 화를 내는 걸 보고 화풀이한다거나 기분 나빠한다고 말하면 내 기분이 나쁘다.
화풀이할 필요도 기운도 없고 목적도 아니며 기분이 나쁜 건 그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이 개선되지 않거나 생각하지 않거나 자기만 생각하고 그 상황을 만든 이기심 때문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그게 그거라 결국 화내는 건 똑같지 않으냐고 하는데.
다르다는 말 외엔 더 할 말이 없다.
나는 화를 내는 게 아니다.
더는 참지 않기로 한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