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가 가장 사랑했던 소설로 알려진 <백치 1권, 15쪽>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런 안다니 신사들을 이따금, 아니 어떤 특정한 사회계층에서는 꽤 자주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모르는 게 없고, 그들의 오성과 능력이 지닌 어지럽고 요란한 탐구열은 막무가내 한쪽으로만 쏠리는데, 물론 이는 현대의 사상가가 할 법한 말을 빌리자면, 인생에서 더 중요한 관심과 견해가 결여됐기 때문이다.
'모르는 게 없다'는 말은 상당히 제한된 범위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무개가 어디서 근무하고, 누구와 친분이 있고, 재산이 얼마나 되고, 어느 현의 지사로 있었고, 누구와 혼인했고, 처가에서 지참금을 얼마나 받았고, 누구와 사촌 사이고, 누구와는 육촌 사이다 등등, 죄다 이런 종류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도 흔히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들이 대부분 신변잡기나 시중에 떠도는 풍문, 연예인 등 유명 인사의 동정처럼 나와 무관한 정보일 때가 많다. 이런 소식들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지만, 정작 그런 사실을 안다고 해서 내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관심을 끌기에 적합한 자극일 뿐, 이런 정보를 알고 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본질적으로 나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지적한 '더 중요한 관심과 견해'가 부재한 상태에서 이러한 피상적인 지식만 채워지면, 내면은 더욱 공허해질 뿐이다.
사람들과 만나서 하는 이야기도 서로에 대한 관심사보다는 이런 유의 대화가 주를 이룬다. 그게 시간이 잘 가고 재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화가 반복될수록 마음속 어딘가가 텅 빈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아마도 도스토옙스키는 이 글을 통해 이러한 내면의 공허함을 지적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한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의 관심사를 보면 된다고 했다. 왜냐하면 관심을 기울이는 방향이 그 사람의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관심을 억지로 끌거나 돌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은 외부에서 오는 강한 자극이 없이는 좀처럼 변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처나 고난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닌 것은 바로 그로 인해 우리의 관심이 새로운 곳으로 향하고, 결국 삶의 우선순위가 재조정되어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상처나 고난에 대해 관심이 많다. 무엇이 오늘의 그를 이끌었는지 알기에 그만한 소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알고, 어디에 관심을 기울이는 가다. 도스토옙스키의 말처럼, ‘안다’는 것은 단순히 많은 정보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도 가끔은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으며,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 모를 때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나의 삶을 결정짓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