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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un 15. 2024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이었을 줄이야

윤대녕 ㅡ 지나가는 자의 초상

"과거의 흔적들을 뒤적이다 보면 내가 지금 떠올리고 있는 기억의 정확한 생성 연도를 산출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일기 따위의 연대기를 기록해 두는 인간은 아니며 더욱이 삶의 사실에 관계된 것들에 그닥 집착하며 살아가는 타입도 아니다. 사실事實이란 문득 또하나의 환영에 불과한 것이어서 사소한 기억들은 때로 피처럼 생생하면서도 그것을 포함하고 있는 공간은 무너져 있기가 일쑤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일들이란 내게 있어서 대개가 그렇듯 새벽녘의 창에 형체 없이 어른거리는 물상物像처럼 보일 뿐이다. 때로는 무엇에 집착하고 매달려도 보았지만, 오직 나의 이름을 부르며 내게 다가왔던 것들조차 얼마 후면 한결같이 나를 외면하고 멀어져 갔으며 곧이어 또다른 일이 밀어닥치곤 했다.


하지만 삶에 있어서의 어떤 일들은 왜 그때마다 우연인 양 내게 다가와,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남긴 채 달아나버리고는, 이토록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마음속에 걷잡을 수 없는 파문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윤대녕의 소설집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에 수록된 단편소설 <지나가는 자의 초상>의 주인공은 직장에서 알게 된 여인과 사귀다가 헤어지고, 정신적으로 의지했던 어머니마저 갑자기 죽자 방황한다. 직장 생활도 여의치 않아 새로운 회사로 직장을 옮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그는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뚫린 듯 허전함을 안고 살아간다.


세월은 덧없이 그리고 무심히 흘러가고. 외적으로 변화가 있었지만 내면의 황량한 느낌은 지울 길이 없다. 사는 것은 그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일 뿐. 삶의 목적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지 오래다.


“내 살아 있음의 유일한 증거였던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와는 느낌이 또 달랐다. 내가 완전한 무로 화해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이제부터 증거도 이유도 없는 삶을 어찌 살아낸단 말인가. 아, 다름 아닌 어머니조차도 남들처럼 한갓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이었을 줄이야."


상실 그리고 부재를 겪으면서 내 곁을 스쳐갔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자의 반 타의 반 왔다가 떠나간 사람들. 내가 그들을 떠나기도 했고 상대가 자발적으로 떠나기도 했다. 그렇게 스쳐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지. 어쩌면 곁에 머물러 있는데도 알지 못한 채 떠나보낸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과거는 흘러갔다는 것. 떠난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그래서 더는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제 허상일 뿐이다. 미련을 두거나 집착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드러난 찬란한 6월. 나는 이 소설을 읽고 같은 마음이었다. 'ㅇㅇㅇ조차도 남들처럼 한갓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이었을 줄이야.'라고 탄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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