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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un 19. 2024

무엇을 남길 것인가

"이 병실에선 이따금 생각하지요. 한 사람의 일생으로부터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요. 무엇일까요? 사진틀 속에서 노랗게 바래가는 가족사진? 가슴속에 간직된 사랑의 얼굴? 돌보는 이 없는 무덤? 살면서 의지해왔던 친구들의 주소나 몇 개의 전화번호들? 그리고 언니에겐 문이? 나에겐 나의 음반? 나는 그만 조용해져서 창에 이마를 갖다 대게 됩니다. 그 어떤 것도 내 가슴속을 잠식하기 시작한 이 마음 시림을 투명하게 걷어내주진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미 누군가의 존재를 잊었듯이, 나의 존재를 기억할 나의 증인들도 사라지겠죠. 나의 아버지를 시작으로 해서 이제 나는 끝도 없이 나의 증인들을 잃어갈 것입니다. 가을이 끝나가는 저 하늘에 잠시 모였다가 흩어지는 저 구름처럼, 결국은 아무것도 남지 않겠죠. 존재의 無. 그러나 끝없는 순환. 한편에서 나의 증인들은 사라지고 다른 한편에서 나의 증인들은 태어나고......"




신경숙 작가의 단편 <감자 먹는 사람들>에 나오는 글이다. 사회에서 만나 알고 지내던 언니에게 써 내려간 편지 형식의 소설이다. 응어리가 없는 사람이 없겠지만, 작가는 그 응어리를 직시하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 부분을 읽고 한참을 생각했다. 언젠가 했던 생각과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생각했던 그 질문, '나는 과연 무엇을 남길 것인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 질문은 너무 거창했다. '무엇이 남을까?'가 맞는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꿈은 거창했으나 이룬 것은 없고 의욕은 넘쳤으나 끝은 미약했다. 남기고 싶은 것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내가 죽으면 모두 사라지고, ㅡ 어쩌면 벌써 잊혔을 수도 ㅡ, 어느 누구 하나 기억하지 않을 것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잊힐 텐데,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어설픈 희망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무엇을 남길 것인가?'라는 질문은 누구나 한 번쯤은 스스로에게 던져봤을 질문이다. 작가가 언급한 것처럼, 가족사진이나 친구들의 연락처, 혹은 사랑의 기억들이 남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존재의 허무함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존재가 無일까? 아니라고 믿고 싶다. 중요한 것은 허무함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다. 결국 우리가 남기고자 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나 기억의 형태일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남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가치를 전달했는지에 있다. 이는 비록 구체적인 형태로 남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무엇을 남길 것인지' 고민하려고 한다. 답을 쉽게 찾을 수 없는 질문이지만 그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는 것만으로도 삶의 의미는 새로워지고 남은 삶 또한 새로워질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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