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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단편소설
"분노거래소"

20 - R14: 구매자, 음모, 분노거래소

『팔렸다. 나의 분노가. 그런데 석연치가 않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해본다. 납득은 간다. 그러나 무언가 기분이 찝찝하다.』




몇 달이 지났을까.


여전히 집에서 빈둥거리며 있다. 전화는 감감 무소식. 답답한 마음에 옥상에 올라가 담배 한 대를 태운다. 

전에 일어났던 일들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통나무집에서 만났던 그 여자가 계속 생각이 난다.


- 가시는 건가요. 그럼 잠시 만요. 제 소개가 늦었군요. 사실 특별한 이름은 없어요. 기억나는 게 없거든요. 그저 K씨나 당신처럼 코드명으로 정했는데 이상하게 보지는 마세요. 어렸을 때 엘리자베스라는 인형을 좋아해서 엘리자베스나 E라고 불러주세요.―


영어로는 Elite, Emotion, 알파벳에서 다섯 번째 글자. 그러고 보면 미스터 마는 마 씨니 M인가? 

쓸데없는 잡생각을 하던 그때였다.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번호제한

K인가. 받아보자.


“여보세요.”

“혹시 특수형-복수의 분노가 선생님께 맞소? 며칠 전에 구매한 사람인데.”


기다리던 구매전화다. 우선 침착하자.


“네. 미스터 마를 통해 얘기는 들으셨습니까.”

“물론. 우리 한번 만났으면 하는데 지금 가능한가요.”


갑자기 왜 만나자고 그러지. 이미 거래했으면 끝난 거 아냐? 

설마 쿠팡처럼 반품해달라는 건 아니겠지. 조금 떠 볼까.


“무슨 문제라도 발생하였습니까. 만나자고 하는 이유를 알고 싶은데요.”

만나기 힘들면 제가 직접 찾아가죠. 아니면 오늘 오후 7시 그랜드호텔 라운지에서 뵙겠습니다.”


내 마음이 가지 말라고 소리친다. 쉽사리 일어나 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가야만 한다. 소중한 구매고객인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부딪쳐보자. 아무 생각 말고.


<그랜드호텔 라운지. 통째로 예약하였는지 안에는 텅 비어있다. 가장 가운데 상석만을 제외하고는. 푸짐하게 차려진 진수성찬. 중앙에는 한 노신사가 조용히 와인 잔을 기울이며 음미한다. 옆에는 날카로운 눈매와 이지적인 외모를 가진 젊은 남자가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라운지에 들어왔는데 아무도 없잖아. 아, 저 사람들인가? 

확실히 200억을 가진 사람들은 재력가밖에 없겠지.


쫄지 말고 당당하게 가자. 가만, 저기 젊은 사람은 설마..


“회장님, 왔습니다.”

“어서 오라고 하게.”


<쭈뼛거리며 남자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는 J. 안내해준 남자는 바로 K였다. 노신사는 J를 지긋이 바라보며 와인 잔을 든다.>


“건배하지. 이래 뵈도 구하기 꽤 힘든 유명한 와인이라고.”

“아, 네.”


<목구멍으로 안 넘어가는 와인을 억지로 비우는 J. K는 그의 모습을 재밌다는 듯이 바라본다. 노신사가 손짓으로 K를 불러 무언가를 건네준다.>


“한번 읽어보게.”


<K가 건네준 그 무언가는 바로 오래된 신문의 기사. 기사의 제목에는 ‘분노거래소에서 발생한 일가족 살인사건, 이와 연루된 사람들?’이라 쓰여 있다.>


“형광펜으로 줄쳐진 곳을 자세히 보게.”


<J가 기사 중간에 형광펜으로 칠해진 문구를 유심히 본다. 


‘…분노거래소를 이용한 고객들 중에는 국내 해운업계의 큰 손, 임 모씨도 연관되어있다. 임 모씨는 같은 업계 경쟁사 CEO이자 오랜 친구였던 박 모 씨가 최근 들어 자신의 회사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과 폭언을 연일 일삼자 격분하여 그가 자주 다니던 골목길 앞에서 차를 타고 대기, 박 씨가 보이자마자 고의로 들이박은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러나 가해자 임 모씨는 박 모 씨를 차로 들이박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임 모씨가 직접 경찰에 진술한 증언에 따르면, 자신은 그 당시 다른 거래처와의 미팅 때문에 모임장소로 향하던 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던 도중 갑작스레 정신을 잃게 되었고 이내 정신을 차려보니 친구인 박 모 씨가 자주 다니던 골목길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상한 느낌에 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펴보니 피해자인 박 모 씨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곧바로 119구조대에 신고하였으나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내가 바로 그 가해자라네.”

"혹시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난 정말로 죄가 없어. 다행히 손을 좀 써서 형량이 낮춰지기는 했지만 내 잃어버린 시간들은 누가 보상해주는가.”

“그래서 분노거래소를 없애시려는 겁니까.”

“K 자네가 얘기했나? 아니라면 저 친구 상당히 이해가 빠르군 그래.”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은 몰랐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저 늙은 노인네가 바로 살인범이라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가 자네의 분노를 사들인 이유도 다 작전의 한 일환이지. 뭐 돈은 돌려달라고 하지 않겠네. 이번 일에 대한 대금이라 생각하고 받게. 자네 나이또래에 그 정도 액수면 상당한 거라고 보는데. 평생 만져보지도, 다 써보지도 못 할 그 200억을 말이야.”


날 호구로 봤군. 


“솔직히 애들 데리고 그곳으로 가 다 때려 부셔버리면 그만이야.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아주 고통스럽고 기억에 잊지 못할 방식으로 복수해주고 싶기 때문이야. 뭐, 사회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서도 말이지. 하하하하”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미쳤어. 난 저들에게 이용당하는 장난감일 뿐이었어.


“최근 분노거래소를 이용한 고객이 자네밖에 없었다는 점과 희귀형의 분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게 크나큰 축복이었지. 작전을 실행할 좋은 미끼를 얻었으니까. 그렇다고 기분나빠하지는 말게. 세상사는 게 속이고 속고, 이용당하고 이용하는 거 아니겠나. 대신 섭섭지 않게 보상도 해주었고.

솔직히 말해 죽이고 싶은 마음도 들긴 했었어. 그렇지만 속으로만 몇 백번이고 실행시켰지, 실제로는 하지 못했거든. 이놈의 양심과 도덕 때문에. 아주 작게 남아있던 내 안의 이성의 끈이 말이야.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힘에 의해 의도적으로 그 친구가 살해당한 건 마음에 들지 않아. 차라리 내가 정신이 말짱해있을 때 그랬더라면 후회하지는 않지. 감히 나를 누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한단 말인가.”


<임 회장이 화를 주체할 수 없었는지 주먹으로 세게 식탁을 내리친다. 그 충격에 의해 접시 몇 개가 쨍그랑하고 소리를 내며 깨진다.>


“좀 흥분했군. 다시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지. 자네가 나를 좀 도와주어야겠어. 물론 직접 미스터마를 죽이는 건 자네 손으로 해야할 테야. 내 손으로 하기에는 나이도 너무 많고 좀 그래. 그렇지만 젊은 자네라면 충분히 할 수가 있어.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되네. 그러나 가능하면 죽여 달라 이 소리지. 살인청부는 아니니 오해 말게. 분노 거래소만 없애버리면 그만 아니겠나.”


머릿속이 복잡하다. 지금 저들이 내게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이해를 못 한 거 같아 앞으로의 계획을 간략히 말해주지. 자네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야. 미스터 마를 만나는 것과 죽이는 것. 나머지 뒤처리는 우리가 하겠네. 해주겠나.”

“J씨. 본의 아니게 설명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워낙 중대한 사항이라 조금 시간적 여유를 두고 추후에 말할 생각이었습니다. 부담 갖지는 마십시오. 이 일을 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습니다. 죽이라고 말씀하셨지만 회장님께서 의도하시는 바는 진짜로 죽이라는 게 아닙니다. 그를 죽이라는 건 바로 그의 『몰락』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가 소유하고 있는 다이어리가 필요합니다. 거기에는 그동안 그곳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이 기록되어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그것을 반드시 가져와주십시오. 쉽지 않은 일이니 필요한 게 있다면 모든 지 지원해 드릴 겁니다.”


K가 최대한 미안하다는 말투로 내게 말한다. 그때 보았던 일기장. 

나의 모든 것이 적혀져있던 그게 핵심이었다니. 진작 가져 올 걸 그랬나.


“거래가 끝났으니 아마 조만간 그놈에게 연락이 올 걸세. 그때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내게 그 일기장을 가져오게. 만약 가져오는 데 성공한다면 추가 보수를 주도록 하지. 만족스러워 미칠 정도로 말이야. 내 용건은 끝났네. 마저 음식을 먹던지 먼저 가도 상관없네.”

“하나만 확실하게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말해보게.”

“미스터 마가 가지고 있는 일기장을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오, 그래. 뭐가 적혀져있던가. 또 어디에 있었고.”

“일기장은 미스터 마의 사무실 뒤쪽 벽난로 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적혀진 내용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다고? 그럴 리가 있나.”

“사실입니다.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빈 란이었습니다.”

“그래도 가져오게. 혹시 모르지 않나. 특수잉크로 쓰여 있든가 무언가의 장치는 분명히 해 놓았을 테니.”

“일기장에 무엇이 적혀 있기에 그것을 필요로 하시는 겁니까.”

“알고 싶나. 가지고와. 그럼 내 직접 보여줌세. 나의 무죄를 입증하고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게 담겨져 있지. 이제 됐나.”

“추가보수. 약속 꼭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이번 일을 끝으로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행운을 빌겠네.”


<J가 라운지에서 나가자 임 회장은 K에게 무언가를 지시한다. 지시를 듣는 K의 입 꼬리가 살며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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