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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묘 Mar 06. 2020

엘사에게 보내는 편지

영화. <겨울왕국 2>, 엘사를 보내고 또 다른 엘사를 기다리다

친애하는 엘사에게


엘사, 딸아이와 함께 멀리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왕관이 꽤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만……, 당신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더군요. 아, 할아버님의 일은 유감입니다. 목숨을 걸고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의 안타까움 내지는 충격이 어느 정도였을지 알 길은 없지만, 그럼에도 책임감이 강한 그대의 성격을 떠올려 보면 마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여겼을 것 같습니다. 과한 평가라고요? 아니요, 절대로 과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아렌델의 왕은 계속 공석이었을 것입니다. 또는 당신의 동생을 발판 삼아 아렌델을 노렸던 한 나부랭이의 차지가 되었겠죠.


엘사, 당신의 책임감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왕위를 잇게 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선왕의 첫째 공주라는 왕위 계승 서열도 그렇고 혼란스러운 정국을 돌파할 수 있는 신이한 능력(얼음을 다스리는 능력 말이죠)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책임감을 일 순위로 꼽고 싶습니다. 다만 당신의 책임감은 어떤 것에 구속되어 강제로 발생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엘사, 당신은 이러니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사람인가요? 아닐 것입니다. 당신이 의무에 이끌리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자리를 내팽개치고 혼자 산으로 들어가지는 않았겠죠. 그래서 오히려 다행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저 이어받은 왕좌에서 당신의 내면은 썩어 들어갔을 테니까요.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의무감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안나와도 서로 마음을 찐하게 나눌 기회도 얻지 못했겠죠. 시간이 그렇게 흘러간다면 아마 아렌델을 멸망으로 이끄는 희대의 미치광이 여왕이 탄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엘사, 저는 감히 이렇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책임감은 단순한 의무 이행 수준을 뛰어넘는 한 차원 높은, 고귀한 것입니다. 그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당신의 책임감 속에 진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묵자는 인간에 대한 순전한 사랑(겸애兼愛)만이 인간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개인적이고 편파적인 사랑을 뛰어넘는 보편적이며 평등한 인류애야말로 진정한 사랑임을 강조했었죠. 저는 엘사, 당신의 사랑이 변모되는 과정 속에서 겸애의 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엘사, 당신은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안나를 지극히 위하는 마음뿐이었죠. 그렇게 당신의 위대한 사랑은 작은 관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안나에 대한 차별적인 사랑을 뛰어넘어 안나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당신의 사랑은 확장되어 갔습니다. 올라프, 크리스토프, 스벤, 그리고 아렌델의 사람들까지 당신의 마음에 담기게 되었습니다. 마법의 숲 안에 있던 댐이 무너져 큰 홍수가 아렌델을 덮칠 때에 당신이 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물벼락을 막으러 갔을까요? 그렇게 헐떡이면서 고생스럽게 말입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당신을 손가락질했던 사람들이 사는 아렌델을 당신은 지켜 내었습니다.

엘사, 그런 당신을 이제는 아렌델에서 볼 수 없는 것이 참 서글픕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당신이 아렌델에 남아주기를 바랐습니다. 당신은 시작부터 계속 중얼거렸습니다. ‘난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 아마도 당신이 갖고 있는 자연의 원소를 다스리는 마법은 일반적인 인간이 갖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당신은 계속 아렌델에서 위화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안나가 아렌델의 새로운 여왕이 되고 당신은 마법의 숲에서 다섯 번째 정령이 된 것은 그런 점에서 안성맞춤인 결말이었습니다. 모두가 제 자리를 찾아간 느낌의 해피엔딩이었죠. 그럼에도 저는 허전합니다. 당신을 아렌델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고 머나먼 곳의 전설처럼 되어 버린 것은 결국 아렌델 사람들이 당신과 같은 사람을 받아들이기에는 준비가 안 되어있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기에 당신의 선택이 아쉽지만, 당신을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니까요. 예전에 만났던 엑스맨의 미스틱이란 사람이 기억납니다. 그녀도 당신처럼 평범한 사람이 아니기에 인간 사회에서 살면서도 늘 번민했었죠. 한때는 비 초능력자인 대다수의 사람이 보내던 두려움과 의심 때문에 그들을 증오하기도 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죠. 그래요, 당신과 참 비슷합니다. 그녀도 마지막까지 평범한 사람처럼 섞여 살지는 못했습니다. 그녀가 밀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 사회가 그녀를 밀어낸 것이겠죠.


엘사, 다양성은 존중받아야지, 차별받아야 할 것이 아닙니다.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정체되어 언젠가는 퇴보하게 됩니다. 당신의 개성은 오히려 아렌델을 풍요롭게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미처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아렌델에 남아준다면 이것을 깨달은 우리의 진짜배기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당신은 아렌델을 떠나게 되었으니, 우리는 다음 사람을 위해 더욱 잘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나중에 또 다른 엘사를 만날 때야말로 그동안 갈고닦은 진짜 책임감을 보여줄 것입니다. 또 다른 엘사는 피부색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신체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을 수도 있고요, 기존의 가치관을 뒤흔드는 사상을 갖고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어떤 엘사든지 간에 우리가 제대로 된 책임감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엘사가 맞이한 해피엔딩처럼 끝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엘사, 당신에게는 자연의 순리에 따르며 마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또 다른 엘사에게는 그런 친구도, 돌아갈 장소도 없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오늘 당신이 아렌델 사람에게 보여준 겸애를 내 마음의 돌에 밤마다 연신 새겨보려고 합니다.


엘사, 새로운 곳에서 더욱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아렌델 내 당신의 자리는 그대로 비워두겠습니다. 아마도 그 빈자리를 보면서 우리는 당신을 추억하며 당신에게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 안녕히.



추신 : 이해할 수 없는 자연의 강력한 힘을 보면 마법도 이상할 것은 없지요. 할아버님처럼 두려워하고 의심하며 지배하려 하는 순간, 비극은 시작됩니다. 이번 일도 결국 가만히 있는 자연을 인간이 먼저 건드리는 바람에 일어난 저주겠지요. 이 부분은 딸아이에게 가르치려고 합니다. 비극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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