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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묘 Mar 13. 2020

어떤 이별

플래시 픽션. 눈 같은 사랑, 불행의 시작

영미의 이별 선언은 갑작스러웠다.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커피 잔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영미의 꽉 다문 입매가 눈에 들어왔다가 이내 물결이 되었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던 경쾌한 재즈의 선율이 조금씩 굵어지면서 느려지더니 어느새 가라앉은 장송곡으로 변해 그를 휘감았다. 상황은 이미 벌어졌다. 울렁이는 세계를 붙잡으려고 그는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짐작하고 있는 것도 없었다. 그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백일을 앞두고 이런 일이 자신에게 벌어졌다는 것을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영미에게 그렇게 잘해줬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입에서 꺼낼 수 있는지 그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오빠의 사랑은 눈 같으니까.


이별하고 싶은 이유를 묻자 나온 대답이었다. 눈 같은 사랑, 눈 같은, 눈……. 암만 생각해봐도 사랑이 눈 같으면 좋은 의미가 아닌가. 그는 궁리했다. 눈 같은 사랑이 왜 이별의 이유가 되는 것인지 알고 싶어 침잠했다. 새하얀 눈이 내리면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다들 감상에 젖는다. 심지어 바둑이까지 좋아하지 않나. 보통 눈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순결, 순수함, 이런 것들이 아닌가. 누구나 동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자연물이야말로 눈이 아닌가. 사랑이 눈처럼 순수하고 순결하다고 말하면 칭찬 아닌가. 그런 사랑이야말로 요즘 같이 세속적이고 쾌락적인 사랑만 노래하는 시대에서는 드물고 귀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게 이별의 이유라니, 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아. 이쯤에서 끝내자.


영미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이 순간 영미는 암호를 건네고 볼일을 끝냈다는 듯 시크하게 사라지던 스파이였다. 굳게 다문 영미의 입술은 도통 열릴 기색이 없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알아먹기 쉽게 설명해달라는 요청을 영미는 차가운 표정으로 쳐냈고, 결국 그의 말은 과녁을 잃고 힘없이 비껴갈 뿐이었다. 그러니 그가 암호를 마침내 풀었다고 해서 영미가 반겨줄 리는 없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백 일도 안 되는 연애를 돌아봤다. 영미에게 최선을 다했던 시간들이 쌓여 있었다. 하루에 연락은 기본 다섯 번, 일어났을 때, 아침 먹을 때, 점심 먹을 때, 저녁 먹을 때, 잠들기 전, 이외에도 영미의 일상이 궁금하면 수시로 연락했다. 늘 관심을 갖고 영미를 살뜰하게 챙겼다. 혹시라도 모를 다른 남자의 치근거림에서 영미를 보호하고 싶었다. 그녀의 연락처에 있는 모든 남자의 번호를 몰래 저장해 전화를 걸었다. 그의 생각에 대부분은 담담히 수긍했다. 예상과 다르게 반응했던 남자는 직접 만나 엄중하게 경고했다. 영미에게 엉뚱한 마음을 품지 않도록 싹을 미리 잘랐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현명한 조치였다. 영미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회사 앞에서 기다렸다. 즐겁게 데이트를 마치고 나면 위험한 밤거리가 미덥지 못해 항상 차로 데려다줬다. 미리 말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게 먼저인 것 같아 영미의 집을 깜짝 방문했다. 어떤 사람이랑 사귀는지 알아야 영미의 부모님도 안심하시고 그와 영미의 교제를 전적으로 지지해 줄 것이라 판단했다. 


그에게는 오직 영미뿐이었다. 그의 사랑은 사특한 마음 없이 오직 영미 하나로 순수했었다. 이런 그에게 영미가 통보한 이별은 정말 이해 불가능한 사건이었다. 그저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을 뿐인데 왜 영미랑 헤어져야 하는지 그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순수한 사랑은 거부당했다. 갈 곳을 잃고 미아가 된 사랑은 자신을 내친 영미가 원망스러웠다. 이해받지 못한 사랑 옆에 이해받고 싶은 분노가 찾아왔다. 그는 불쑥 고개를 들어 영미를 찾았다. 맞은편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단지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 잔만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그는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스마트폰을 꺼내 단축번호 0번을 무섭게 눌렀다. 




아마 그는 평생 모를 거야.


찬바람에 영미는 옷깃을 여몄다. 이별을 고했지만 아쉬움은 없었다. 이유가 필요한 그에게 영미는 그저 눈이라는 한 단어만 던졌다. 그의 사랑을 눈에 비유한 것은 영미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였다. 과연 그 의미를 그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그가 스스로 그 의미를 깨닫고 변할 수 있을까. 혹시라도 모를 일이지만……, 기대는 하지 않았다. 자기 본위의 사랑만 알고 있는 그에게 이별의 이유를 구구절절이 설명해 봤자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 역시 긴 말은 필요 없었다. 


그녀의 뺨에 문득 새하얗고 차가운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눈이었다. 마치 벌레라도 붙은 것처럼 영미는 진저리 치며 눈을 털어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은 몇몇 송이로 시작해서 그 수를 점차 불려 나갔다. 순간 우웅 우웅 우웅 불길한 진동 소리와 함께 핸드백 속에 있던 스마트폰이 마구 떨기 시작했다. 그였다. 잠시 스마트폰을 확인하느라 우두커니 서있던 사이, 거리는 온통 눈밭이었다. 영미는 불편한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끊기지 않고 울어대는 진동을 무시하며 거리를 가로질렀다. 그와 함께 있던 카페에서 한사코 멀어지고 싶었다. 길가에 서있는 앙상한 가로수가 분주하게 걷는 영미를 무섭게 내려다봤다. 생기 하나 느낄 수 없는 나무가 양팔을 벌려 거칠고 억센 손으로 자신을 강제로 붙잡으려는 것에 영미는 몸서리쳤다. 얼마나 지독한 집념인지 진동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핸드백에서 덜덜덜 떨고 있는 스마트폰의 불안감이 몸 전체로 스며들었다. 스마트폰과 자신 중 무엇이 더 떨고 있는지 영미는 종내 분간할 수 없는 채로, 그저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 끝 - (낱말 : 686개, 글자 수 : 2046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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