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몰랐지만 커서 알게 된 나의 성격 중 하나는 꼼꼼하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우산이 몇 개이고, 손에 물건을 쥐고 있으면 어딘가 빠뜨리고 오는 것은 일상이었다. 그런 나의 별명은 '덤벙이'였고 성인이 되기까지도 내가 꼼꼼하다고 생각하며 살아본 적이 없었다.
내가 꼼꼼한 성격을 가지게 된 원인이 뭘까?
생각해 보면 나는 타인에게 보이는 것. 즉, 평가받는 모든 행위에 예민하다.
나의 외적인 모습이든, 업무를 알려주는 상사에게든, 나를 통해 업무 처리를 하는 고객에게든. 누군가에 의해 무엇이 되었든 평가받는 것에 있어서는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라도 있었는지 예민하게 업무를 처리하는 경향이 있었다.
미취학아동 시절에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목걸이 만드는 활동을 한 적이 있는데 노란색과 하늘색 중 각자 원하는 색을 골라갔다. 내가 먼저 원하던 하늘색을 골랐지만 본인이 원하는 색을 얻지 못한 다른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마치 내가 본인의 손에 있던 목걸이를 가로채 가기라도 한 것처럼. 선생님은 모둠의 아이들 중 나에게 콕 짚어 양보해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싫다는 말이 턱끝까지 올라왔지만 나의 거절이 나를 못된 아이로 만들까 두려워 양보를 강요받았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고 하던가?
지금의 나는 모든 사람에게 착한 사람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착함이 강요되는 시기였다. 그렇게 주변의 요구에 다 맞춰서 들어주는 나는 '착한 아이'였다.
그런 내가 착한 아이에게 선물을 준다는 산타할아버지와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의 착함을 순수하게 인정해 주는 날이니까. 자신의 뜻대로 맞춰줘서 '착하다' 하는 것과 산타할아버지가 인정하는 '착한 아이'는 달랐다.
크리스마스 시즌, 어린이집에서 준비물로 선물을 준비해 오라고 한 적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여러 색상의 글라스데코를 구매해 기분이 좋았지만, 아쉽게도 그건 준비물이었다. 나의 것이 아니라는 아쉬움으로 준비물을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잠시 잊고 지냈을까.
크리스마스이브였는지, 크리스마스 날이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엄마가 갑자기 나를 불러냈다.
"ㅇㅇ아, 잠깐 나와봐~! 산타할아버지 오셨어!"
믿기지 않는 소식에 어안이 벙벙하여 방에서 나오니 마당에는 산타할아버지가 서 계셨다.
내가 생각했던 뚱뚱한 할아버지의 느낌은 아니었지만 빨간 옷과 덥수룩한 흰 수염은 산타할아버지의 상징이 분명했다.
산타할아버지는 내가 착한 아이라며 선물을 건네주고 함께 사진까지 찍어주었다.
사진을 찍고, 산타할아버지가 다음 아이에게 선물을 주러 가야 한다며 떠난 이후에도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하늘에서는 이미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고 내복 바람으로 산타할아버지와 만났다는 설렘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사실 나는 산타할아버지와 루돌프를 함께 보고 싶었다.
진짜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을까? 산타할아버지도 사람(?)인데? 이 좁은 길목에 루돌프가 어떻게 들어왔을까? 선물을 운반하려면 썰매가 커야 할 텐데 썰매도 타보고 싶다는 생각과 동시에 이상한 감정으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산타할아버지가 떠난 지 꽤 되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 앞 골목까지 뛰쳐나왔다.
역시 언제 산타할아버지가 다녀갔냐고 할 만큼 집 앞 골목은 고요했다. 산타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온 것이 환상인 것처럼.
아쉬움과 동시에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어릴 땐 그 감정이 뭔지 알지 못했다.
산타할아버지가 주신 선물을 열어보니, 얼마 전 어린이집에 제출했던 글라스데코 세트가 들어있었다. 산타할아버지는 역시 무슨 선물을 가지고 싶은지 다 알고 계신다는 생각과 함께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성인이 된 지금에는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 나에게 선물을 가져다준 것은 산타 분장을 한 선생님이었을 것이고, 준비물로 제출했던 선물이 산타가 가져다준 선물이란 것을.
내가 느낀 이상한 안도감의 정체가 이것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산타의 존재를 마음속 깊이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바로 뛰쳐나가 루돌프를 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혹시 루돌프가 오토바이는 아닐까 하는 의심을 계속 품고서.
안도감의 정체는 차가운 현실을 마주하지 않은 데 있었다.
산타의 존재를 계속 믿어도 되겠구나 하는 안도감.
나의 겁쟁이 같은 본능이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발걸음이 그렇게 무거웠나 보다. 그렇게 나의 동심은 조금 더 지켜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