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길고양이 이야기
밤낮으로 고양이들이 운다. 어제도 새벽까지 울더니 오늘은 대낮에도 운다. 가르릉 가르릉 대다가 째지는 소리로 캬악거린다. 가장 많이 들리는 소리는 으아앙 하고 길게 우는 소린데, 꼭 아기 우는 소리 같다. 적어도 서너 마리는 넘는 것 같은데, 마릿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매일같이 산책을 다녀도 고양이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어디에들 숨어 있다가 서글픈 울음소리를 내는 걸까.
고양이는 사람들의 상반된 반응을 이끌어 낸다. 반응의 온도차는 다른 동물들에 대한 것보다 훨씬 크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예찬에 가까운 말들을 늘어놓는다. 고양이의 도도함, 귀여운 발바닥, 새침한 애교, 가끔씩 보여주는 맹한 구석까지. 어찌 이 동물을 사랑하지 않고 견딜 수가 있냐고 묻는다. 반면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아주 저주받은 요물 수준으로 치부한다. 무섭고 음침하고, 건방지고 시끄러운 동물은 질색이라며 학을 뗀다.
길고양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캣맘’이라고 불리는 익명의 고양이 애호가들은 고양이가 다닐 만한 길목 곳곳에 물과 사료를 놓아둔다. 우리 동네에도 종종 보인다. 산책 중에 가끔 유자가 고집스럽게 킁킁댈 때는, 고양이를 발견했거나 길고양이 무료 급식소의 냄새를 맡았을 때다. 캣맘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주기적으로 새 사료가 채워져 있는 걸 보면, 길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조용하지만 끈질기다는 걸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캣맘이 조용히 고양이들의 밥을 챙겨주는 것과는 다르게, 길고양이 반대파들은 마음대로 목소리를 높인다. 물론 오늘은 고양이들이 좀 시끄럽긴 했다.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고양이들에게 뭐라 뭐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발정 나서 망측하게 운다느니, 저 고양이 놈들은 다 어떻게 해버려야 한다느니, 썩 꺼지라느니 하는 내용이었다. 자기들끼리 하는 불평불만 수준을 넘어 고양이들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아주 큰 목소리로 명령하듯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양이는 계속 울었다. 삼십 분쯤 지났을까, 애들이 나타나서 고양이를 찾아다녔다. 애들도 몇 마디 소리를 지르고 뛰어다녔는데, 잡아서 때려주자, 이런 내용으로 들렸다. 아무리 울고 있는 고양이라도 초등학생한테 잡힐 리는 없다. 애들은 금방 사라졌다.
애정에는 지속성이 있고, 증오는 단발성이다. 아주 단순한 기준으로, 나는 더 끈질긴 편의 손을 들어 주고 싶다. 만약 길고양이에 대한 누군가의 증오가 아주 오래되고 뿌리 깊은 것이라면, 그 감정은 캣맘의 애정만큼 중요하고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보통은 잠깐의 짜증으로 치부될 수준인 것 같다. 그래서 캣맘 vs 우리 동네 길고양이 반대 연합 중에서는 캣맘을 마음으로나마 지지하게 된다. 선악을 나누고 싶단 얘기는 아니다. 그저 끈질김의 문제다. 금방 추워질텐데, 고양이들이 좀 더 끈질기게 살아줬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