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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Jul 20. 2022

가족과 인연을 끊고 달라진 것들

마음이 이렇게 편할 수 있구나

삶이 이렇게 평화로울 수 있구나

다들 이렇게 사는구나



늘 가족들 눈치를 보느라 고단했던 저는

가족과 연락을 끊고 난 후 삶이 이렇게 심플할 수 있다는 것에 매일 놀라고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 제약이 없음이

이렇게 홀가분하고 산뜩한 일인지 몰랐거든요.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으로 채울 수 있다니

이런 세상도 있음을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날, 아빠는 저에게 또다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명절이었고, 시댁에 갔다가 친정에 조금 늦게 도착했다는 이유로 

남편을 투명인간 취급하고, 저에겐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자기를 기다리게 했다는 것이 분노의 이유였습니다. 

감히 '너희 따위가' 자기를 무시했다며 그는 분노를 참지 않았습니다. 

참을 이유가 없었겠죠.

그에게 나와 남편은 만만하고 쉬운 상대였으니까요.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화를 낼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날은 명절이었고, 당연히 도로에는 차가 많았습니다.

천호동 끝에서 마포까지 오는 데는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습니다. 

아빠는 자기 생각보다 늦게 오는 우리를 기다리는 동안 짜증이 났고

(내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데) 왜 시댁에서 늦게 출발해서 사람을 기다리게 하며,

이러니 너는 (당연하게도)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이럴 거면 앞으로 오지 말라는 말도 잊지 않고 쏟아냈습니다. 

결혼 후 첫 명절이라고 시댁에서 일부러 챙겨준 선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요.



그날, 저는 더 이상 아빠와의 관계를 지속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그의 눈치를 보고, 오늘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에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진절머리가 났지만 

내가 아닌 남편에게까지 무시와 경멸, 비난이 이어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아빠는 관계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상대를 깎아내리고,

본인이 인정할만한 사회적 위치와 학벌, 집안이 아닌 이들에겐 대놓고 무시하며

함부로 대하는 것이 일상인 그런 사람이니까요. 



아빠의 핸드폰 번호를 차단하는 손이 바들바들 떨렸습니다.

이미 울만큼 운 상태였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심장은 쿵쾅거렸습니다. 

왜 나는 가족과 인연을 끊어야 하는지

남들처럼 평범하게 가족과 잘 지낼 수 없는 이 상황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슬폈습니다. 

한동안은 슬픔과 두려움이 제 삶을 잠식했습니다. 




3년이 조용히 지나갔습니다. 

가족과 인연을 끊으면 큰일이 일어날 것 같지만 삶은 또 아무 일도 없는 듯 흘러갑니다. 



지금 저는 엄마와 간간이 안부를 주고받는 정도로 연락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가끔 만나자고 해도 엄마는 아빠 눈치를 보느라 만나는 것을 자제합니다. 

3년 동안 엄마를 본 건 딱 두 번, 통화도 두세 번 한 것이 다였습니다. 



아빠는 가끔 발작처럼 저에 대해 분노하고 저주를 퍼붓지만

평소에는 마치 제가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말도 꺼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가끔씩 집안 소식을 전해주는 오빠도 오빠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고

90세가 넘은 할머니는 요양원에 입원한 후 먹을 것과 아빠 외엔 큰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그럼 그 시간 동안 저는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강박증이 거의 나았다는 것입니다. 

냉장고 문을 열 때도, 휴지 한 장 쓸 때도, 길을 걸을 때도

끊임없이 생성되던 규칙들은 사라졌고,

더 이상 그 무엇도 제 숨통을 조이지 않습니다.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어 발버둥 치던 마음도 많이 내려놓았습니다. 

스트레스로 인해 달고 살았던 피부병도

지독하게 따라다니던 자괴감과 모멸감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내 감정에 솔직해지면서 나도 몰랐던 진짜 내 모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스스로의 자아보다 부모 입맛에 맞는 착한 아이가 되는 것이 더 중요했던 사람이었어요.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보다 부모의 감정을 살피는 일에 더 익숙했죠.



하지만 이제는 '나'를 들여다보는 것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인지

나는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나는 삶에 있어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같은 것들을 말이지요. 



저는 제가 가족에서 빠져나가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습니다. 

가족과 함께 사는 것도 지옥이었지만 그들과 분리되는 것 또한 지옥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삶이라는 건 항상 그랬듯이 제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가족과 인연을 끊고 나서야 비로소 저는 저를 찬찬히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살면서 누구든 자기를 찾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을 놓치고 살다 보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삶을 살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저는 이제야 그 시간을 찾은 셈이지요. 


언젠가 내가 내 인생의 중심에 서서 단단히 뿌리를 내리게 될 때

그때엔 가족과 마주 볼 용기가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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