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다빗 킴 촬영을 마치고 멕시코시티에서 버스로 15시간 거리 산크리스토발 데 라스카사스 San Cristóbal de las Casas 행 버스에 올랐다. 이곳에서 며칠 묵어가며 지친 체력을 보충했다. 그리고 다시 17시간짜리 버스에 올랐다. 목적지는 한인 디아스포라와 독립운동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도시 메리다였다.
천신만고 끝에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에 도착한 한인들은 살리나크루스에서 짐짝처럼 기차에 올라 코아트사코알코스 항구로 간다. 그런 뒤 다시 배를 타고 프로그레소Progreso 에 닿는다. 최종 목적지 메리다가 지척인 곳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5월 중순 쉼 없는 이동을 멈추고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한인들은 메리다에 도착해 간략한 환영식을 치른 뒤 애니깽 농장주 손에 이끌려 10~50명씩 20여 개 농장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일부는 황무지나 시멘트 광산 등으로 보내 졌다.
농장에 도착하자마자 한인 남성들의 분신 같던 상투가 모조리 잘려 나간다. 농장주들은 한인들의 문화를 이해할 생각이 전혀 없었 다. 단순히 위생만을 생각했고 생산성만을 고집했다. 평생 입던 한복도 더는 입을 수가 없었다. 낯설고 어색했지만 담요 등으로 소매가 긴 옷을 해입어야 했다.
괴상한 옷을 입고 상투가 잘린 채 일터로 나간 사람들, 난생처음 보는 작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니깽이었다. 한인들에겐 큰 육체적 시험이었다. 작렬하는 유카탄의 햇볕은 지옥 불같이 뜨거웠다. 목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고 살갗은 뱀처럼 허물이 벗겨졌다. 애니깽 가시는 악마의 손톱인양 사정없이 온몸을 찔러댔다.
임금도 듣던 거와는 차이가 컸다. 당시 애니깽 농장의 임금체계는 실적 중심이었다. 일이 손에 익지 않은 한인에게는 무척 불리한 조건이었다. 게다가 임금의 5분의 1정도를 농장주가 맡아 보관하다 계약 만료 때 위로금 조로 돌려주는 관행 때문에 실질 임금은 더욱 낮았다. 이마저도 적합한 절차 없이 농장을 옮길 경우 몰수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노예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노예가 아니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모습이었다. 당시 돼지 한 마리 값이 80전 정도였는데 한인 노동자 한 사람의 몸값은 불과 30전 정도였으니 그 실상이 얼마나 참혹했겠는가.
누구는 외로움을 참지 못해 마야인과 결혼해 살림을 차렸고 누구는 4년을 버틸 자신이 없어 절망 앞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농장 생활 초기 이렇게 죽은 사람이 10여 명에 달했다. 여기에 풍토병으로 사망한 사람도 20여 명이나 됐다. 그리고 또 누구는 감옥 같은 생활을 견디지 못해 야음을 틈타 담을 넘었다.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언어는 물론이고 낯익지 않은 지리 탓에 경찰이 나 추격꾼들에게 체포돼 잡혀 오기 십상이었다. 일부 농장주들은 도망치다 잡혀 온 사람들을 가시 돋친 애니깽 위에 눕혀 물에 젖은 채찍을 내리쳤다. 때론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일이 시 작되면 체포에 들어간 인건비까지 갚도록 했다. 탈출에 성공한다 해도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여비가 없었고 서쪽으로 가는 배는 살리나크루스 항에서만 탈 수 있었는데 이도 일본 이민회사 직원이 지키고 서 있었다. 탈출자들은 멕시코시티로 가든지, 목숨을 걸고 미국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멕시코에 와 있던 중국인들이 이런 딱한 모습을 동정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당시 허훼이란 중국인이 편지를 써 샌프란시스코 에 한인들의 참상을 전하는데, 이 내용이 대한제국까지 알려지며 1905년 7월 29일자 <황성신문>에 관련 기사가 실린다.
모두 조각조각 떨어진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신었으니 (중략) 부인은 자녀를 팔에 안고 혹 등에 업고 길가를 배회하는 모양이 실로 우마와 가축과 같아, 보는 이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다. 이곳토인이 지구상 5~6등等 의 노예라 칭하는데, 한인은 그 밑인 7등 노예가 되어 영원히 우마와 같고 농장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무릎을 꿇리고 구타를 당하여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낭자하니, 차마 못 볼 정형에 통탄 통탄이라 하였더라.
기사가 보도되자 동포들을 송환하라며 민심이 들끓는다. 책임자를 처벌하란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소식을 접한 고종이 8월 1일 대책 마련을 지시한다. 이에 멕시코 정부에 진상 조사와 한인 보호를 요구하는 전문을 보내는 한편 외부협판(외무차관) 윤치호에게 현지 조사를 명한다. 하지만 그는 뱃멀미와 넉넉지 못한 경비 등을 이유로 하와이까지 갔다 아무 소득 없이 10월 초에 돌아오고 만다. 그러면서 윤치호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동포들에게 멕시코 이민 실태 를 파악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런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미주 지역 한인들은 멕시코 동포들을 돕기 위해 성금 모금 등에 나서지만 크게 도 움이 되진 못한다. 한인들의 처참한 소식은 1905 년 12 월 20일자 <대한매일신보>에도 소개된다.
이민 온 동포들이 낮이면 불같이 뜨거운 가시밭에서 채찍을 맞아가며 일하고 밤이면 토굴에 들어가 밤을 지내며 매일 품값으로 35전씩 받으니 의복은 생각할 여지도 없고 겨우 죽이나 끓여서 연명할 뿐으로 그 처지가 농장주인의 개만도 못하다고 합니다.
이 내용을 전한 사람은 샌프란시스코에 살던 박영순이었다. 그는 고려인삼 장수였는데 1905년 11월 멕시코에 갔다 동포들의 실상을 목격하게 된다. 박영순은 곧장 인삼 보따리를 내려놓고 급히 편지를 써 이 소식을 알린다. 그런 와중에 상동청년회가 자체 경비를 마련해 박장현(본명 박희 병)을 멕시코 현지로 파견한다. 1906년 1월 24일 멕시코시티에 도 착한 그는 기대와 달리 위험하고 험난한 메리다행을 포기한다. 조사는 애니깽 농장에서 탈출한 한인 두 명을 만나 상황을 전해 듣는 걸로 마무리된다. 이후 미국 등지에서 멕시코 한인들을 하와이로 이주시키려고 노력하지만 국적 문제 등으로 유야무야된다. 무엇보다 가슴을 치게 만드는 건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으로 외교 권을 박탈당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단 사실이다. 외롭고 모질기만 했던 애니깽 농장에서의 4년. 어느새 자유의 몸이었다. 꿈에 그리던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다시 태평양을 건너지 못한다. 형편은 멕시코에 도착 했을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당시 성인 하루 일당은 35전 정도였는데 하루 음식 값으로 25전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농장주들은 대한제국에서 멕시코까지의 전대금(여비) 까지 함께 갚아나가게 했다. 실질적으로 애니깽 농장에서 일하며 귀국 경비까지 저축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농장주들은 노동계약이 끝난 뒤 지급하기로 한 위로금(100원)조차 지급하지 않고 오히려 농장을 떠나려면 계약 당시 지급받은 150원을 되갚으라고 우겨댔다. 또 농장에서 태어난 아이와 농장에서 자란 여자들은 농장주 소유란 해괴한 논리로 한인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통에 무슨 돈으로 빚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 간단 말인가.
더군다나 한인 대부분은 스페인어를 구사하지 못했다. 일꾼들이 쓰는 마야어가 더 친숙한 사람들이었다. 언어는 한인들을 애니깽 농장에 잡아두는 보이지 않는 족쇄였다. 무엇보다 대한제국이 처한 현실은 이들이 멕시코를 떠날 수 없게 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고향이란 희망은 애니깽 농장에서 해방되고 1년 남짓 만에 허무하게 물거품이 된다.
멕시코의 한인들을 생각하면 덫에 걸린 사슴이 떠오른다.
곧 눈물을 떨굴 것 같은 큰 눈을 가진 사슴 한 마리가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감내하며 발버둥 치는,
사력을 다해 발길질해보지만
그럴수록 악어 이빨 같은 아가리가 더 깊이 발목을 파고드는,
그렇게 늪에 빠 져드는.
카메라를 챙겨 새벽 5시 여명이 밝아오는 애니깽 농장을 촬영했다. 그 옛날 조상들이 하루를 시작했던 시각, 그들은 어떤 빛을 보며 어떤 풍경 속에 스며들었을까. 흔적 없는 이야기를 재현한다는 건 집요한 눈으로 100여 년 전 삶을 들여다보고 잠시 그들이 될 수 있어야 가능했다.
<김동우 작가는>
2017년 인도여행 중 우연히 델리 레드 포트가 한국광복군 훈련지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부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10개국에서 작업을 이어 왔다. 크게 관심받지 못했던 작업이 전시 출판 등으로 조금씩 알려지자, 유퀴즈온더블럭 광복절 특집편 출연 등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 전국 각지에서〈뭉우리돌을 찾아서〉전시를 열어왔으며 지은 책으로는《뭉우리돌의 바다》,《뭉우리돌의 들녘》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