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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립 김동우 Apr 01. 2024

애니깽 밭으로 간 안창호

멕시코

멕시코시티에서 낭만과 은의 도시 과나후아토 Guanajuato를 거쳐 마리아치 Mariachi의 고향 과달라하라 Guadalajara로 향했다. 이 도시는 멕시코 민속음악을 연주하는 길거리 악사 마리아치가 태동한 곳으로 유명하다. 과거만큼 명성이 높진 않지만 현재도 마리아치 양성 학교가 있을 정도다. 게다가 과달라하라는 테킬라의 본고장으로도 입소문이 나 있다. 도시 분위기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 세워진 고풍스러운 건축물이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어 예스럽고 고즈넉하다. 그래서인지 과달라하라는 오래전부터 ‘서부의 진주’란 별명으로 불렸다.


이달고 동상, 과달라하라, © Kim Dong Woo


특히 이 도시는 멕시코 독립운동의 영웅 미겔 이달고 Miguel Hidalgo 신부와 인연이 깊다. 이달고 신부는 1810년 9월 16일 돌로레스(과나후아토 인근)에서 독립 선포 종을 치는데 이 순간이 멕시코 독립운동의 시작이 된다. 멕시코는 이날을 독립기념일로 삼고 있다. 이달 고 신부는 독립 선포 종을 울리고 적군을 피해 과달라하라에 몸을 숨긴다. 그런 인연으로 이 도시에선 멕시코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Jose Clemete Orozco의 걸작 <일어나라 이달고>를 감상할 수 있다.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의 걸작 <일어나라 이달고>, © Kim Dong Woo


과달라하라 주청사 건물에 그려진 그의 프레스코 벽화는 숨이 멎을 정도로 엄청난 아우라를 뽐낸다. 웅장한 계단 벽 전체를 강렬한 이미지와 색채로 표현한 이 작품은 멕시코 최고의 걸작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아니, 지금까지 60여 개 나라를 여행하면서 본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 감동적이었다. <일어나라 이달고>는 익숙함에서 낯선 느낌을 끄집어내 자기만의 해석을 가미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 왜 우리나라 화가들은 독립운동가를 주제로 이런 대작을 남기지 못했을까. 고개를 90도로 꺾고 입을 떡 벌린 채 작품을 감상하는 마음은 아쉬움으로 가득했다.


흥미로운 건 과달라하라가 우리 역사와도 살짝 옷깃을 스친 적 있단 사실이다. 무슨 인연이 있는지 잘 떠오르지 않을 거다. 당연하다. 이런 사실이 밝혀진 건 불과 몇 년밖에 안 된 일이다. 그 인연의 주인공은 안창호다. 그는 왜 멕시코에 갔고 거기서 무슨 일을 한 걸까. 안창호는 멕시코 한인들의 초청을 받고 1917년 10월 1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산호세 호를 타고 21일 멕시코 만사니요 Manzanillo 항구에 도착한다. 27일 여섯 명의 한인들이 멕시코시티에 당도한 안창호를 환영한다. 며칠 여독을 푼 그는 동포들이 있는 베라크루스 Veracruz, 코아트사코알코스 Coatzacoalcos, 프론테라 Frontera를 거쳐 11월 말에서 12월초 쯤 메리다에 도착한다.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 안창호가 중심이 돼 미국에서 설립한 민족계몽 독립운동 단체) 메리다 지방회는 동포 1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환영식을 개최한다. 미국을 출발한 지 한 달 반만의 일이었다.


당시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이었던 안창호가 멕시코를 방문한 이유는 한인들의 노동문제 해결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안창호는 애니깽 농장주와 한인 노동자 사이의 불합리한 관행 등을 개선하려 노력한다. 또 각지에 흩어진 한인들을 찾아다니며 대한인국민회 설립 취지와 목적을 설명하고 독립운동 참여와 지지를 당부한다. 그러면서 교육사업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당시 안창호는 대한인국민회 멕시코연합총사무소 설립이란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멕시코 각지에 세워진 지방회를 중앙에서 통합 관리하는 방안이었는데 한인들의 경제・교육・규모적 역량이 부족해 당장 계획을 실행할 순 없었다.


안창호는 1918년 5월 26일 메리다에서 석별의 정을 나누고 베라크루스 항에 도착한다. 그리고 마지막 일정으로 6월 3일 탐피코 Tampico에 있는 한인들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안창호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건 8월 29일이다. 안창호는 멕시코 일정을 거의 다 끝내고 세 달 가까이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 그 의문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곳이 바로 과달라하라다.


1918년 6월 안창호가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돌아가려 할 때다. 멕시코시티 미국 총영사관이 사증(비자) 발급을 거부한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란 이유였다. 당시 안창호는 일제가 발급한 여행권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대한제국이 식민지가 되기 전 나라를 떠나왔기에 일본 국민이 될 수 없고 고로 일제의 여행권이 필요 없단 주장을 펼쳤다. 끝끝내 사증 발급이 거부된다.


프란세스호텔, 과달라하라, © Kim Dong Woo


그러자 안창호는 멕시코 제2의 도시 과달라하라로 향한다. 그리고 프란세스 호텔 Frances Hotel에 머물며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하지만 안창호는 과달라하라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멕시코와 미국 국경 노갈레스 Nogales로 가 어렵게 입국 비자를 받는다. 안창호의 고행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1919년 미국->중국 

안창호는 4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하와이를 경유해 4월 29일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2주간 머물며 중국 행 배를 기다린다. 그리고 홍콩을 거쳐 5월 25일 상해에 도착한다.


1921년 중국->미국(입국 거절) 

중국에서 미국행을 재차 시도하는데 또 입국이 거부된다. 안창호는 이때쯤 중국인으로 귀화해 중국 여행권을 취득한 것으로 보인다. 전 세계를 무대로 한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인이 되길 마다하지 않은 셈이다.


1924년 중국->미국 

11월 22일 상해를 출발, 하와이를 거쳐 12월에 도착한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한다.


1926년 미국->남태평양->호주->중국 

3월 하와이를 거쳐 중국행을 추진하지만 미국 이민국이 이를 거부한다. 안창호는 오스트레일리아로 행선지를 변경한다. 그는 남태평양 팡고팡고 Pango Pango 섬, 수바 Suva 섬 등을 경유해 3월 23일 시드니에 도착한다. 그리고 4월 14일 브리즈번 Brisbane으로 가 배를 타고 4월 22일 홍콩을 거쳐 5월 16일 상해에 도착한다.


그런 뒤 안창호는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1929년 2월 9일부터 3월 30일까지 50여 일간 필리핀 각지를 시찰하고 중국으로 복귀한다. 안창호의 필리핀 방문은 일제의 힘이 미치지 않는 남방 지역에서 한인 집단 거주지를 건설하려는 계획 때문이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상해에서 안창호가 체포될 당시, 그는 자신은 중국인이라며 체포의 부당성을 항변한다. ‘중국인 안창호’는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그에게 돌고 돌아가는 길쯤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위해 길목이 막히는 건 두고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형식상 중국인이 되는 것 또한 그의 독립운동이었다.


독립기념관은 지난 2016년 프란세스 호텔이 안창호가 머물던 곳 이란 사실을 새롭게 밝혀냈다. 호텔 1층은 널찍한 중정으로 꾸며져 있었다. 분수대 위로 길게 늘어진 멋진 샹들리에가 눈길을 사로잡는 홀에선 흥겨운 마리아치 공연이 펼쳐진다고 했다. 이곳 한쪽 벽면에 안창호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이 부착돼 있다. 한글과 스페인 어로 병기된 동판 내용은 아래와 같다.


프란세스호텔, 과달라하라, © Kim Dong Woo


도산 안창호 선생이 머문 곳 

멕시코 과달라하라 프란세스 호텔은 1910년대 해외 한인의 대표기 관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이 1918년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숙박한 곳이다. 안창호 선생은 해외 한인사회의 단합과 독립운동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멕시코 전역을 10개월 동안 순행하고 미국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이 호텔에 머물렀다.


나무 계단을 올라 하얀 페인트가 깔끔하게 칠해진 복도를 거닐었다. 복도 벽면에는 호텔의 초창기 시절 흑백 사진이 여러 장 걸려 있었다.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안창호가 이 호텔에 머물 당시 주변 풍경이 쉬 짐작된다. 삐거덕대는 나무 바닥, 시간이 겹겹이 내려앉은 듯한 창틀 등이 흑백 사진과 어우러지면서 꽤나 복고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복도 벽에 붙은 전등만 아니었다면 100년 전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이는 풍경이었다.


프란세스호텔, 과달라하라, © Kim Dong Woo


안창호는 이 호텔 어느 방에 묵었던 걸까. 확실한 건 그가 정문으로 들어와 중정을 지나 계단을 오르고 객실로 향했단 사실이다. 한 독립운동가와 한 사진가가 시간을 초월해 공유할 수 있는 가장 확 실한 공간이었다. 그는 이 호텔에 머물며 멕시코 순회를 어떻게 복기했을까. 혹시 안창호는 독립의 종을 울리고 몇 달 뒤 처형된 이달고 신부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까. 알았다면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점치고 있었을까. 호텔 로비에서 그가 올랐을 그 계단을 똑같이 밟으며 이런저런 질문을 과거로 던져본다. 오래된 나무 계단이 곧 장 삐거덕대며 알아들을 수 없는 답을 해온다.


사위가 어두워지자 마리아치가 무대에 오른다. 흥겨운 음악이 호텔 안을 꽉 채운다. 투숙객들이 하나둘 방문을 열고 나와 무대 앞에 자리를 잡는다. 100여 년 전 그도 이 음악을 들었을까. 그와 함께 와인 한 잔을 나누며 음악에 취해 귀엣말을 나누고 싶다. 당신은 총을 들지 않은 영웅이요, 말 없는 민족의 웅변가라고. 


<김동우 작가는>

2017년 인도여행 중 우연히 델리 레드 포트가 한국광복군 훈련지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부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10개국에서 작업을 이어 왔다. 크게 관심받지 못했던 작업이 전시 출판 등으로 조금씩 알려지자, 유퀴즈온더블럭 광복절 특집편 출연 등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 전국 각지에서〈뭉우리돌을 찾아서〉전시를 열어왔으며 지은 책으로는《뭉우리돌의 바다》,《뭉우리돌의 들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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