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살리나크루스 촬영을 마치고 자정쯤 멕시코시티 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밤새 어둠을 뚫고 길 위에서 여명을 맞았다. 뻑뻑한 눈을 비비대며 작은 휴게소에서 아침을 먹었다. 버스는 그 길로 종일 북진해 오후 늦게 멕시코시티에 닿았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작은 침대가 기다리는 숙소를 찾아 들어갔다. 다음 날 촬영이 걱정됐는지 전전반측하며 쉬 잠에 들지 못했다.
하 수상한 시절 재산 대부분을 나라를 찾는 데 헌납했다는 멕시코의 대표 독립운동가 김, 익, 주. 멕시코에 오기 전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손자를 촬영하는 일, 이 만남이 내게 어떤 의미일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배우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역사였고 이젠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버린 이야기였다.
다빗 킴은 한국말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멕시코에서 태어나 평생을 산 사람이었다. 우리말을 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다빗 킴의 집 근처에서 한국인 통역을 만났다.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동시에 후손을 만날 때마다 통역을 구하고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이 작업 방식을 얼마나 끌고 갈 수 있을지 적잖이 고민됐다.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뒤 한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할아버지 한 분이 문을 열고 나왔다. 다빗 킴이었다. 그 옆에는 이국적 외모를 가진 그의 딸이 서 있었다. 아니, 멕시코에서 이국적인 사람은 그녀가 아니고 나였다. 실팍한 고려청자가 놓인 협탁 옆에 자리를 잡은 다빗 킴은 옛날 사진을 꺼내놓고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길 들려주었다.
김익주는 1905년 32세 나이로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멕시코 이민 배에 오른다. 메리다 근처 초촐라 Chochola농장에서 일했는데 벽화를 그려 농장주 사이에서 이름이 알려진다. 그림 실력이 좋았던 지 벽화를 그릴 땐 일을 쉴 수 있었다고 한다. 4년간의 계약 노동 기간이 끝나자 김익주는 멕시코 동부 탐피코로 가 음식점을 경영하며 큰돈을 번다. 그는 경제적으로 가장 빨리 성공한 한인이었다. 그때 지은 한국식 정자 모양 2층 식당은 당시 탐피코에서 가장 유명한 소위 ‘핫플 HotPlace’이었다. 나중엔 식당까지 모두 팔아 독립운동에 보탰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1920년 기준으로 김익주가 임시 정부 등에 보낸 독립자금은 1,500달러에 이른다. 또 그는 대한인국 민회 탐피코 지방회 결성에도 앞장섰고 3・1혁명 기념식, 순국선열기념식 등을 주도해나간다. 안창호가 멕시코를 순회할 때 후원에 나서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김익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한 바 있다.
다빗 킴은 할아버지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독립자금 모금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고 말했다. 몇 년 뒤 광복이 찾아왔다. 꿈에 그리던 일이었다. 이제 됐다며 환호성을 내질렀을지 모른다. 그리고 찾아온 분단, 김익주는 크게 실망했다. 다빗 킴은 할아버지가 가장 슬퍼하고 낙담한 순간이 그때였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이념에 사로잡힌 동족상잔, 독립운동가에게 이보다 비통한 일이 또 있었을 까. 김익주는 절망의 문턱에서 얼마나 큰 상실감을 느꼈을까.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지 않을까. 다빗 킴이 눈물을 글썽인다.
“할아버지는 다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집에선 무조건 한국어로 대화하려고 노력했죠. 그때 배운 한국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지 않았으면 벌써 잊어버렸을 단어들이죠.” 다빗 킴은 ‘밥 먹어라’, ‘공부’ 등의 한국어를 또박또박 정확하게 발음했다.
언어뿐만이 아니다. 당시 이민 1세대들은 정신과 겉모습까지 한인이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산 사람들이다. 당연히 결혼도 우리끼리여야 했다.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은 그들에게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길이었다. 하지만 다빗 킴은 멕시코가 고향인 사람이다. 멕시코인과의 결혼이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그렇다고 뿌리에 대한 인식이 불분명한 것도 아니다.
“멕시코인 부인 사이에서 낳은 제 딸도 한국에서 연수를 받으며 한국 문화를 경험했죠. 그녀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 지. 나는 한 번도 조상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멕시코에서 태어났지만 뿌리는 한국이죠. 그 이유 하나만으로 지금까지 한국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같은 핏줄이 아니면 경험 할 수 없는 일들이었죠.”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한 말이다.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의 손을 잡고 따뜻한 온기를 나누며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말을 건네고 싶었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마른침을 삼키며 애써 참았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다빗 킴을 거실 빨간색 소파에 앉게 했다. 삼각대를 세우고 셔터를 길게 열었다. 셔터가 떨어지기 전 그를 장면에서 나오게 했다. 잠 시 뒤 찰칵하고 셔터가 떨어졌다. 한 장의 사진 안에 그가 있던 장소와 그가 사라져 버린 공간이 하나가 됐다. 두 개의 이야기가 중첩되며 상이 흐릿해졌다. 역사에 대한 우리 인식이 그랬고, 점점 희미해 져 가는 증거자의 오늘이 그랬다. 그리고 그렇게 지워지면 안 된다는 내 뜻이 그랬다. 결론적으로 먼 길을 되돌아왔던 결정이 이번 작업의 큰 이정표가 됐다. 아마도 이 만남이 아니었다면 독립운동가 후손을 기록하는 일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김동우 작가는>
2017년 인도여행 중 우연히 델리 레드 포트가 한국광복군 훈련지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부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10개국에서 작업을 이어 왔다. 크게 관심받지 못했던 작업이 전시 출판 등으로 조금씩 알려지자, 유퀴즈온더블럭 광복절 특집편 출연 등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 전국 각지에서〈뭉우리돌을 찾아서〉전시를 열어왔으며 지은 책으로는《뭉우리돌의 바다》,《뭉우리돌의 들녘》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