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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는언니 Jul 04. 2016

11. 여행과 생활

여행과 생활의 간극


‘이것은 내가 아닌 항상 남이다’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관광객'이다. ‘남이 하면 스캔들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공식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남이 하면 '관광객', 내가 하면 '여행자'. 현지인의 입장에서 보면 똑같건만. 나는 관광객이 되지 않으려고 괜한 수고로움을 자처하곤 한다. 남들 휴가가는 성수기는 피해주는 센스. 편한 트렁크를 마다하고 굳이 배낭을 메야 여행 기분이 난다는 자기 세뇌. 그렇게 여행을 떠나서는 또 다른 욕망에 사로잡힌다. 여행자가 아닌, 마치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그러니까 생활인이 되어보고 싶은 것이다. 어슬렁거리며 동네 산책을 다니고 카페에 앉아 알 수 없는 언어의 신문을 뒤적거리기도 한다. 그리고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며 상상에 잠긴다.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어하는 풍경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여행과 생활은 그 간극이 상상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


 




여행자의 일기
산토리니섬 이아(Oia) 마을에 있는 엽서 가게 앞을 지나갈 때면 항상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리스 전통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이 좋아서 오늘도 가게 앞을 서성거리며 엽서를 골랐다. 어떤 걸 고를까. 갈등이 생긴다. 그나저나 이렇게 경치 좋은 곳에서 엽서를 팔다니. 가게 주인은 복도 많지.


생활자의 일기
오늘도 똑같은 그리스 전통 음악을 틀었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려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저 여자는 어디서 왔을까? 일본? 중국? 어제는 엽서를 만지작거리며 가격만 물어보더니 또 왔네. 오늘은 몇 장이라도 사야 할 텐데. 가게 위치가 좋아서 월세가 얼마나 비싼데 말이야. 




여행자의 일기
바다를 바라보며 걷다가 거리의 화가를 만났다. 슥슥- 붓질 몇 번에 파아란 바다와 하늘이 그대로 화폭으로 옮겨졌다. 감탄을 하며 그림의 가격을 물어보니 여행자인 내 처지에는 좀 비싼듯 했다. 이렇게 매일 멋들어진 풍경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는 일은 얼마나 행복할까.  


생활자의 일기
아름다운 풍경도 이제 나에게는 똑같은 일상이 되어간다. 오늘은 그림을 3점이나 그렸다. 사람들은 나의 그림에 감탄을 한다. 하지만 사는 사람은 별로 없는걸 보면 아무래도 가격을 내려야겠는걸. 그림이 팔리면 아테네로 가야지. 그리고 파리 행 비행기표를 사는 거야! 




여행자의 일기
눈부시게 새하얀 건물들과 그 사이로 펼쳐진 푸른 바다. 때마침 흰 옷을 입은 호텔 직원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모습은 마치 광고 속의 한 장면 같다. 아름다운 곳에서 일도 하고, 돈도 벌고, 운동도 되고, 이것이야말로 일석삼조가 아닐까? 

  

생활자의 일기
아침부터 비오듯 땀을 쏟았다. 오늘 도대체 몇 번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건지. 이럴줄 알았다면 아마 오지 않았을지도 몰라. 이건 노동이라고. 곧 비수기가 되면 나도 휴가를 가야지. 이제 올라가는 건 지겨워. 이곳의 더운 날씨도. 그래, 스위스로 스키를 타러 가야지.




여행자의 일기
여행지에선 현지인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빼놓을 수 없다. 광장에 가니 마을 아저씨들이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계신다. 나는 아저씨들을 바라보고 그들은 나를 바라보고. 우리는 서로 구경 중. 야사스! 어눌하지만 그리스어로 슬쩍 인사도 건네 보았다. 


생활자의 일기
은퇴 후 마땅히 할 일이 없어 광장 벤치에 나와 앉았다.  야니스! 니코스! 이봐, 뭐 재미있는 일 좀 없나? 자네 아들은 아테네로 간다며? 녀석은 섬을 지겨워했잖아. 젊은 것들은 다 도시로 가길 원한다니까. 그래도 관광객들 덕분에 덜 심심하네. 좀 전엔 중국 여자가 우리말로 인사도 하던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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