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ll the lighrt we cannot see
바다로부터 솟아오른 듯, 깎아지른 단정한 생말로의 성벽과 성채의 모습에 마음이 홀렸던 나는
과일을 깎을 때조차도 오렌지를 생말로의 성벽처럼 깎아놓곤 했다.
오렌지를 반으로 잘라서 두꺼운 껍질을 측면으로만 도려내고 나서,
이걸 보면 연상되는 도시가 없느냐고 나는 그에게 묻곤 했다.
누가 오렌지를 그런 식으로 깎느냐는 그의 웃음 섞인 질타에 나는 대답하기를
생말로에 마음이 가 있는 사람은 모든 것에서 그 도시의 성벽을 발견한다고 했다.
북해를 마주한 노르망디와 브리타니의 경계에 놓인 돌로 만든 성채.
바다에서 솟아오른듯한 돌로 지은 해적들의 도시.
페리를 타고 한 나절 걸려 바다를 건너면 영국이다.
여러 해 전에 사두고 읽지 못하고 있던 소설
all the light we cannot see가 이 도시에서 전개된다.
넷플릭스에서 시리즈로 제작된 것을 발견한 지난겨울,
나는 때마침 출시된 메타 퀘스트 3을 쓰고 생말로의 성채로 들어가서
소년과 소녀와 함께 전쟁을 겪었다.
오렌지를 성벽처럼 깎곤 했던 것은 메타 퀘스트가 데려다준
생말로의 생생한 현실감 덕분이었던지도 모른다.
전쟁은,
파리의 눈먼 소녀와 독일의 고아 소년을 세상의 끝, 독일군에 점령된 생말로로 데려다 놓았다.
파리에서 피난 온 소녀와 무전병으로 차출된 독일의 소년.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의 존재를 알진 못했으나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빛이었다.
우리가 볼 수는 없어도 자기 자리에서 반짝이는 수많은 빛의 조각들.
포화와 불벼락에 휩싸인 성벽의 도시에서 그들은 서로를 볼 수는 없지만 서로에게 방패가 되었다.
각자의 방법으로 전쟁을 버텨내는 이들의 가슴 벅찬 이야기.
맹인 소녀 마리를 연기하는 여배우는 전에 본 적 없는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지녔고
까만 눈동자와 까만 머리, 작은 체구에 지적인 아우라가 예사롭지 않다.
소년 베르너가 쏟아져 내리는 연합군의 불벼락의 포화를 뚫고
소녀를 구하러 달려가던 그 성벽을 확인하고 싶었다.
아빠를 향해 날마다 그리움을 송신하던 마리네 집도 궁금했다.
아침과 함께 암스테르담에 내린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이틀 후에 닿을 브리타니의 생말로.
예약해 둔 차를 스키폴 공항 내에서 인도받아 두 개의 국경을 소리도 소문도 없이 넘었다.
유럽형 경차 대신 미국형 suv를 내주어 장거리 주행은 한결 편했다.
겨울이 막 물러간 플란더스의 평화로운 들판을 지나고,
비바람 부는 노르망디 거칠고 광활한 해변을 지나
해협을 건너면 영국에 닿는 브리타니 지방의 경계,
생말로까지 840 킬로를 이번에도 달리고야 말았다.
여권을 요구하는 국경 검문소도 없었고 언어를 바꿀 필요조차 없었다.
대여섯 시간을 달리고 나서야 다른 국가에 왔있다는 자각을 했을 뿐.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 운전하는 로드트립을
다시는 하지 않겠노라 매번 다짐을 하지만
비행기를 몇 시간씩 타고 날아간 여행지에서 우리는 매번
관성에 끌린 듯 다시 차를 빌리고, 기어이 몇백 킬로 로드트립을 떠나곤 한다.
땅의 굴곡, 가없이 펼쳐지는 평야의 색깔, 해변의 풍경과
완만한 산등성을 오르고 내릴 때 눈에 가득 들어오던 다양한 수종의 실루엣 등을
마음에 잔뜩 담아서 돌아온다.
다음번 여행을 기다리며 일용할 마음의 디저트 같은것.
2. 해적들의 도시
귀여운 배모양의 성의 보루가 선언하고 있다.
이곳은 뱃사람들의 도시라고.
저 귀엽고도 센스 넘치는 감각이 해적들의 머릿속에서 나왔단 말인가.
성 안의 골목길.
돌로 지은 집들과 골목길은 뭐라 이름할 수 없는 모노톤으로 연결되어
집과 골목길이 하나로 뭉쳐진듯한 풍경은 마치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바다와 하늘만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고 간혹 장식 없는 빨간 대문들이
생뚱맞게 포인트를 연출하고 있었다.
민낯에 입술만 빨갛게 바른 순박한 여인의 얼굴 같은 생뚱맞은 대문들.
여행에서 돌아온 뒤 나는 빨간 대문과 창살 창문이 있는 사진을 랩탑의 배경화면으로 지정해 두었다.
인적이 없었고 고요하기만 한 골목으로 투명한 새소리가 파문을 일으키듯 들려왔다.
공기도 햇살도 자비로운 날이었음에도, 온통 딱딱한 돌로 만든 이 성채를 보고 있자니
겨울이면 얼마나 추웠으며 젖은 날이면 얼마나 우울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영국의 해안도시 hull을 출발한 고래잡이 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안 멕과이어의 무시무시한 미스터리 소설 the north water가 드라마로 제작되었을 때
배경이 된 영국의 도시 hull의 모습은 생말로의 이 골목을 보는 듯했다.
성벽 위의 곧은 산책로에는 남녀노소 가족들이 평일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는데,
생말로에서의 가장 놀라운 일은 이때 일어났다.
핑크색 스커트에 하트모양의 선글라스까지 한껏 멋을 내고 나온
여자아이는 세 살이나 되었을까. 혼자 걷는 일에 이제 막 익숙해진 듯한 걸음걸이였다.
입에는 아직도 떼지 못한 쪽쪽이를 문 꼬마가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흔들흔들 걸으며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또래의 꼬마 소년을 아래 위로 훑고 있었는데 어머나...
그 모습은 소위 헌팅 나온 날라리 하이틴의 표정이거나
사교장에 나와 먹잇감을 찾는듯한 한 여인의 노회한 시선을 닮아 있었다.
쪽쪽이를 입에 문 채 시선을 아래위로 훑으며 놀이 상대를 찾는 아기라니..
내가 뭘 본거지...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는데
뒤쫓아온 그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이번에는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오늘 한 건 해 볼까 하는 껄렁껄렁한 표정으로
또래 여자 아이들을 훑어 보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웃으며 전해주는 그도 고개를 절래 절래 젓고 있었다.
이 동네 물이 다른가 봐.
발음도 설익은 아기들이 벌써부터 저런 표정이 가능하다니
부모들이 대체 뭘 먹이고 뭘 보여주는 거지?
가끔씩 느끼지만 프랑스인들은 too much 한 면이 있는데,
쪽쪽이를 무는 시절에 too much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같은 날 오후에 스쳐 지났던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은 한 술 더 떴다.
비쩍 마른 체형에 두꺼운 안경을 쓴 열 댓살의 남자아이는
자켓을 열어젖히고 빨간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세상의 고뇌를 다 짊어진듯한 표정으로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것은 그 나이의 표정과 걸음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세련된 스웩이 물씬 물씬 가득했는데
카뮈가 아마도 저 나이에 저러고 다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재미있는 생말로의 꼬마들.
학교에 가 있어야 할 것 같아 보이는 꼬마들이
가족들과의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프랑스의 자유로운 영혼들.
이 도시의 다른 계절이 궁금해 졌다.
프랑스인들이 가장 휴가를 보내고 싶어하는 곳이라는
이 도시의 다른 얼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