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을 마치고 2년 가까이 근무했던 장애인복지관은 늘 행사가 많았다. 평일 야근도 종종 있었지만, 주말에 행사가 있으면 군소리 없이 나가야 하는 분위기였다.
일을 시작하고 나서 몇 달 안 되었을 때였다.
어느 행사준비회의에서 관장님이 전 사회복지사에게 일요일에 출근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야기 끝에 혹시 안 되는 사람 있느냐는 질문이 던져졌다. 모두가 조용했다. 상사의 말에 토를 다는 것이 무척 튀어 보이던 시대였다. 말이 회의이지 사실상 통보인 자리이기도 했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당시에는 작은 교회의 성가대원이었다. 맡은 일도 있지만 예배를 빠져 본 적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 용기를 짜내어 손을 들었다. 동료들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주목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저는 크리스천인데, 맡은 일도 있어서 예배를 빠지기 어렵습니다. 대신 주중에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관장님은 당황하신 듯했지만 공식적으로 허락을 요청했으니 답을 주셔야 했다. 잠깐의 머뭇거림, 그리고 허락이 떨어졌다.
"그래? 종교의 자유를 침해할 수야 없지. 예배는 가야지. K선생은 그렇게 하고.. L선생과 R 선생도 교회 다니는 줄 알았는데 크리스천이 아닌가 봐? 다른 사람들은 출근하도록."
용기는 내었지만 의외의 허락에 어리벙벙했다.
회의를 마친 후. L, R 선생은 자신들은 미움받을까 봐 용기가 없었다며, 내성적인 나답지 않았다고 놀라워했다. 알고 보니 실제로 그들도 교회를 다녔고, 두 사람 역시 성가대원이었던 것이다.
사회복지사는 봉사직이라며, 월급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명감으로 일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당연하던 시대였다. 분명 전문직임에도 다른 직종보다 덜 받고, 더 일해도 대놓고 불평하기 어려운 직종이었다.
선배 세대들이 걸어간 힘든 길을 답습하며 사회복지사들은 박봉과 과로에 시달렸다. 동료들끼리 가장 먼저 사회복지의 혜택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우리 사회복지사들이라는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남자사회복지사의 이직률이 더 높았던 이유이기도 했을 것 같다. 당시 사회복지 실천현장의 평균임금은 맞벌이가 아니면 생활하기 힘든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이 날은 내가 처음으로 상사의 말에 토를 단 날이었다. 그리고 나는 2년 후 그 직장을 그만두기까지, 행사 당일 이외의 주일에는 출근하지 않는 유일한 직원이 되었다. 물론, 주중에는 야근을 해가며 더 열심히 일했다.
동료들도 나의 용감함을 놀라워했을 뿐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형식적으로나마 모두에게 기회는 있었기 때문 아닐까. 조금, 부러워하기는 했던 듯하지만.
원칙을 지키려던 단 한 번의 용기, 그 한 번이 기적 같은 상황을 만들어내었다.
그날의 나 자신은 눈치 없어 보였을 테고, 어쩌면 무모해보였겠지만 용감했던 듯하다.
비슷한 일은 회식자리에서도 이어졌다. 다른 동료들과 달리 나는 원치 않는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되었다. 공인받은(?)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이다.
종교적 신념이 예가 되었지만, 돌아보면 당연한 것이 당연해지기 위해 많은 용기가 필요한 시대였다. 지금 일하는 후배 사회복지사들에게는 좀 더 즐겁게, 자기 자신을 챙기며 일할 수 있는 수준의 워라밸이 가능하기를 바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