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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ㅡ별꽃 Jan 17. 2022

장봉도에 가다

욕쟁이 할머니라더니


거실 창문 밖 나뭇가지를 흔드는 겨울바람이 헤픈 몸살을 한다. 오랜만에 친구와 배를 타고 는 장봉도로 떠났다.

물이 빠진 바다에 얼음이 얼었다

"나보고 부럽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만큼 인생이 힘이 드니까 떠나는 거야. 살다 보면 힘든 일이 더 많지 좋은 일이 더 많어? 힘든 것이 아홉 개면 좋은 것은 한 가지야. 내 팔자가 그만큼 드세다는 거겠지. 힘드니까 미친년처럼 떠났다 돌아오고 또 떠나지. 얌전한 언니도 여행을 좋아하면 그만큼 속이 편치 않은 거야. 말도 마. 여행하다 죽을 고비는 얼마나 넘겼고 별의별 일들이 다 많았지. 내가 캄보디아에 딸이랑 여행 갔는데 가던 날 딸이 바로 한국으로 돌아갔어. 딸이랑 여행하면 좋을 것 같지?

욕쟁이 할머니 식당 내부

 여행을 같이 해보면 딸도 평상시 모습과 달라. 싸운다니까. 나 혼자  캄보디아에 남겨지고 보니 막막한 거야.  나는 여행하기 전 그 나라 공부를 엄청하고 간다고. 어디에서 버스를 타고 어디에서 내려 갈아타고, 식당은 어디가 맛있는지 눈에 보이도록 공부를 하고 가는데, 딸이 갑자기 돌아가고 난 후의 일들은 공부를 안 했으니 막막했지.


택시를 잡아타고 '코리아 호텔, 코리아 호텔'을 외치는데 나도 택시기사도 환장하는 거야. 우여곡절 끝에 한국사람들이 단체 관광을 와서 묵는 호텔을 찾았지. 여행은 어떻게 하냐고? 다 방법이 있어. 무조건 한국인을 찾아서 나는 왕비라 아무것도 모르니까 안내해줘야 한다고 따라붙는 거야.

삶은 낙지를 잘라주시는(너무 젊으셔서 나는 언니라 불렀다)

어떤 때는 한국사람을 한 명도 못 만날 때가 있어. 그럴 때는 인상 좋은 사람을 찾아서  같이 다니는데 말도 안 통하는데도 밌다니까. 캄보디아에서 돌아올 때도 공항을 가야 하는데 택시 기사한테 에어포! 에어포! 하니까 못 알아듣는 거야 하하하; 비행기 날아가는 흉내를 냈더니 알아듣고 공항에 내려줘서 간신히 비행기를 탔다니까.

유채 물김치가 진짜 환장하게 맛있었다

먹어봐 이게 세상에 둘도 없는 맛이라니까. 맛이 두 개면 안되잖아. 라오스에서 배워 온 거야. 라오스에 유채가 얼마나 많은지 어떤 한국 여자가  유채를 사서 호텔에서 물김치를 담아 빵이랑 먹더라고. 그때 배웠지. 뭐든 살아남으려면 나만의 특별함이 있어야 하는 거야."



장봉도 마을 풍경

하늘부터 땅까지 회색 커튼을 쳐둔 것처럼 칙칙한 날이다. 반려견 별과 함께 하조대를 가려고 준비를 하던 중 장봉도를 가자는 친구의 연락에 행선지를 바꾼다. 오랜만의 동행이다.


삼목항은 한산했고 바다는 얌전했다. 배는 시도에 한번 정박 후 바로 장봉도로 향한다. 회색빛 하늘과 맞닿은 장봉도 바다는 수면 위로 엷은 햇살을 펼친다.


매섭게 달라붙는 추위에 사진 몇 장을 찍고 차 안으로 뛰어든다. 십 년 전쯤 바닷길 트레킹 이후 처음인데, 지난 시간을 마을은 개발의 흔적으로 보여준다. 개미 한 마리 드나들지 않는 식당과 카페는 한산하다 못해 서늘하다.

저 멀리 텅 빈 들녘을 걷는 아낙의  모습이 쓸쓸한데, 긴 여정에 나선 기러기떼들이 빈 논에서 배를 채우고 일제히 날아오른다.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던 친구는 갈 곳이 있다며 목적지를 변경해 벽화마을 주변 허름한 날림 건물 앞에 차를 세운다. 비닐로 만든 엉성한 문을 밀고 들어가니  세계 여행 사진으로 벽전체가 도배되어있다. 티브이를 끊은 지 오래라 드라마니 연예프로를 거의 알지 못하는 내게, 친구는  이 집 할머니가 얼마 전 세계 30개국을 혼자 여행한 욕쟁이 할머니로 방송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부재중이신 할머니께 전화를 드리고 기다리는 중에 어떤 여인이 생새우 한 보따리를 주방에 두고 간다. 갑작스레 심장수술을 하고 퇴원했다는 동네 남자 주민도 다녀간다. 별이는 심심한지 주방에서 김을 찾아 뜯는데 보기에도 여장부처럼 생긴  할머니가 큰 박스를 캐리어에 싣고 식당 문을 밀친다. 할머니라고 부르기가 무색해 나는 '언니'라 칭한다.



"뭐 드실 거야?"

"낙지랑 소라, 그리고 칼국수랑 소주 한 병 주세요."

"낙지가 없어. 대신 죽은 낙지를 데쳐서 산 낙지보다 맛있게 먹게 해 줄 테니 기다려봐. 맛이 죽인다니까. 소라는 안 먹어도 낙지만으로도 배부르게 해 줄 테니 그만시켜. 많아서 못 먹어."


쟁이시라더니 욕은 온데간데없고 에너지를 주 못 하는 인정 많은 언니일 뿐이다.


"자  이걸 뚝 잘라서 여기에 싸서(아흑! 침 넘어간다 이 밤에) 초고추장을 찍어서 먹어봐. 봄동에 싸서 강된장을 발라먹어도 끝내준다니까."


위생장갑을 낀 채 데친 낙지다리 하나를 뚝 떼 송송 썬 야채에 깨소금을 얹고, 초고추장을 뿌려 다리와 야채를 돌돌 말아 입안에 밀어 넣는 순간, 아찔한ᆢ정말 현기증이 솟았다. 아삭한 야채와 부드러운 낙지에서 쏟아지는 즙과 섞인 초고추장이 내는 맛에  오른손 검지를 접은 끝으로 오른쪽 눈썹을 툭툭 친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맛이다. 벌건 대낮에 못 마시는 소주 한잔을 걸친다. 데친 새우도 육즙이 풍부하고 달큼해 게눈 감추듯 입안으로 쓸어 넣었다.

소라가 달다 달아

밖은 사나운 바람이 웅웅 우는데 떠나온 사람들은 아련한 여행 속으로 깊이 빠져든다. 7080 노래가 잔잔하게 흐른다. 유채로 담았다는 물김치 국물은 입안을 한 바퀴 돌아 식도를 개운하게 훑고  알싸하게 위장에 머무른다. 아삭하게 씹히는 유채 향에 금방이라도 봄이 올 것만 같다.


이번엔 데친 소라다. 포크로 소라 알을 찍어 한 바퀴 돌려 당기면 푸르댕댕한 내장과 쓸개까지 깨끗하게 빠져나온다. 쓸개는 배탈이 날 수 있으니 제거한다. 봄동을 한 장 펴 손바닥에 얹고 소라를 올린다. 송송 썬 야채와 달래, 매운 고추를 얹고 강된장을 발라 야무지게 봄동을 오므려 입안 가득 밀어 넣는다. 입술 가장자리로 흘러내리는 즙을 오른손 엄지손가락 옆구리로 꾹꾹 눌러 닦으며 희한한 신음소리를 토한다. 맛의 신세계다.


"나만 내는 맛이라니까. 내가 전남 고흥이잖아. 전라도는 아무렇게나 해서 줘도 맛있어. 먹을게 지천이라 펑펑 재료를 써서 그래."

태국 고추라는데 엄청맵다

배가 불러오는데 자연산 굴에 참기름을 한 방울 뚝 떨군 양은그릇이 먼저 나오고, 해물이 푸짐한 칼국수에 고추 다진 양념을 곁들인다. 굴 향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어서 개발한 메뉴라는데 장히 특별했다. 칼국수를 한국자 덜어 굴에 섞은 후, 후루룩 국수가락을 빨아올리고, 다진 양념을 섞은 국물을 들이켜니 속이 개~~ 운 해지고, 매운 기운이 장을 훑으니 정신까지 맑아진다.


 여행을 많이 다녀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힘들었기에 여행으로 이겨냈다는 욕쟁이 할머니(언니)의 말씀이 국물을 들이켜는 중에도 뇌리에 쏙쏙 들어왔고, 나만 할 수 있는 것을 개발하지 않으면 살아남기가 힘이 들기에 당신만의 비법을 끊임없이 연구한다는 말씀도 뭉클했다. 

달래장과 함께 먹는 해물전

"벽에 쓰신 글을 보니 책을 내셔도 되겠던데 출간도 생각해 보세요 언니."

"글은 계속 쓰고 있어. 몰라  나 죽고 나면 누가 책을 낼 수도 있겠지 뭐."


해물전은 아무리 맛있다 해도 더 이상은 못 먹을 것 같아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해물전에 달래장을 듬뿍 얹어 입안 가득 밀어 넣는 친구의 얼굴에 꽃이 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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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둥굴레를 우려낸 물에 탄 커피믹스 맛이 기가 막히다. 반을 접어 넘긴 오후의 틈으로 새어드는 바람이 매섭다. 욕쟁이 언니네 식당 비닐 문을 밀치는 순간 바람이 와락 품으로 달려든다.


우리나라와 네덜란드만 한다는 방역 패스에  어딜 가기도 짜증 나고 화나는 시절을 잊기에 장봉도의 하루는 충분했다.

둥글레를 우려내고 있다

브런치에 뜸했다. 일을 하는 것인지, 글을 쓰는 것인지, 영화를 보는 것인지, 책을 읽는 것인지, 음악을 듣는 것인지, 기도를 하는 것인지.. 잘하는 것 한 가지도 없이 정신만 늘어놓고 살았다. 2022년은 조금 더디게 걷더라도 나 자신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물론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몇 년 전 겨울과 여름을 합쳐 꼬박 한 달을 모로코 여행을 다녀왔다. 그냥 흘려보내기가 너무 아쉬운 시간이기에 여행기를 쓰고 있다. 이제 겨우 초고를 마치고 퇴고 작업에 들어갔다. 출간이 될지는 나도 알 수가 없지만 아쉬움을 남기지 않으려 애쓰는 중이다. 작가님들 글을 읽어보기도 벅찬 시간이라 좋아요도 댓글도 달지 못함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글을 읽지도 않고 좋아요를 누를 만큼 담대하지 못하기에 고백처럼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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