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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ㅡ별꽃 Nov 13. 2022

안녕 브런치

치유의 계절

길섶에 핀 해바라기와 눈을 맞춘

"엄마. 생각해보니 나는 여행을 좋아하고, 카페에서 작업하는 것도 좋아하고, 친구들도 좋아하던 애였더라. 가을이 이렇게 예쁜걸 참 오랜만에 느껴보네. 상담하면서 항상 느끼는 건데 상담사랑 엄마랑 하는 이야기 80% 정도가 일치해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아.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엄마 말을 일부러 부정하기도 했지만 엄마 아들로 태어나서 너무 감사하고 행복해요. 고마워요. 한 번도 나를 외면하지 않고 보채지도 않고 늘 한결같이 기다려줘서. 그리고 환자로 하지 않아서 그게 참 고마워요. 난번에 제주여행 진짜 잘 다녀온 것 같아. 엄마의 뛰어난 여행 감각에 솔직히 많이 놀랐고 감동받았어요. 여행 후로 부쩍 좋아진 걸 느껴요."

제주여행 사진

늦가을 햇살이  슬그머니 창가 자리를 차지한다. 열어둔 문틈으로 새어든 바람은 애꿎은 풍경을 흔들고  아슬하게 버티던 낙엽 하나가 '툭' 떨어지더니 공중제비를 돈다. 붉다 터진 홍시를 쪼아 먹던 까치가 포로로 날더니 늦가을 한 뼘 잠에 취해 게으름 피우던 벌레를 콕콕 찔러 기절시키더니 꿀꺽 삼킨다.


글을 안 쓴 지 120일이 되었다는 브런치 알림에 참 게을렀구나, 그동안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계절이 벌써 두 번 바뀌었구나 그랬구나  싶었다. 살면서 가끔 '이건 꿈일 거야' 라며 놓인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날은 얼마나 많았던가. 아이는 엄마한테 한결같았다고 말하지만 나는 때론 지치고 슬펐다.  하필 내 아이가 아파야 하는지 꿈을 꾸는 것만 같았고 인정하기 어려웠다. 누구보다 따뜻하고, 배려심이 많고, 친절하고 영특한 속 깊은 아이였고, 늘 주변은 친구들이 흘러넘쳤다. 자존심도 강하고 자존감도 높았다. 타고난 달란트도 많아서 신의 손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아이 손에 잡히는 소소한 소품들은 작품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고, 클레이 애니메이터로  성공을 눈앞에 두었을 때 아이는  쓰러졌다.


적된  삶의 무게가 버거웠음을 아이가 아프고 난 후에야 깨달았으니 어미로서 나는 무엇을 했던 것일까란 자괴감에 너무도 통스러웠다. 맞벌이를 하면서 놓치고 살았던 부분이 많았음을, 아프지 않아도 되는 아이였음을 뒤늦게 깨달았으니 후회라는 단어와 절망은 같아 보였다. 환경이 그랬다. 깊은 이야기를 나열하기엔  나란 인간이  담대하지 못하기에 가슴에 꼭꼭 묻어두련다.

제주여행 사진

아이와 함께 일어서다 엎어지기를 수천수만 번, 우리는 서로 좌절과 희망과 포기라는 단어 사이에서 그 무엇도 잡히지 않는 막막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서로를 걱정했고, 괜찮은 척했고, 행복한 척하고 있었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아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다 성장한 청년이다) 평범하게 꾸리는 일상에 내 아이를 대입시키며 눈물을 쏟았고,  평소에 찾지도 않던 신을 향해 간절하고 애가 타는 기도를 쏟아냈다.  어쩌면 나의 스물네 시간은 싫든 좋든 몸과 마음과 행동, 의식마저도 아이에게 집중되어있었는지도 모른다. 세상 즐거움이 모두 사라졌고 감정은 롤러코스트를 타듯 아찔하고 아슬한 순간의 꼭대기에 올라가 있음이 보였다. 그러다 바닥까지 내팽개쳐지기를 반복했다. 아이의 감정에 따라 나도 같이 흔들렸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는 자신의 병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우울증으로 알고 치료를 받았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음이 이상했고, 우울증 증세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띠는 증상들에 대한 의구심을 품던 중 유튜브 채널에서 자신이 겪고 있는 증상과 완벽하게 일치되는 증상을 설명하는 의사 선생님을 찾아냈다. 우린 곧바로 선생님을 찾아가 세밀한 진단을 받고 그에 맞는 약 처방을 받게 되었는데, 유년기부터 외부의 다양한 환경이  ㅡ예를 들면 억압이라고 해두자ㅡ누적되어 전두엽이 심하게 손상되어 성인 ADHD로 진행이 되었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아들이 찍어서 보낸 사진

그 순간  긴 시간 동안 품었던 의문이 일시에 해소가 되면서 허탈감도 밀려왔다. 치료의 실마리를 찾게 된 것 같아 희망이란 단어도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약을 바꾸고 난 후 불과 보름 만에 아이는 놀랄 정도로 급속한 회복을 보이기 시작했고, 표정이나 말투는 물론 감정 고르게 안정되고 있음이 확연하게 보였다. 오더를 받고  2년 동안 작업을 못해 계약파기하는 일도 있었는데, 약을 먹기 시작하고  한 달쯤 지나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받은 오더를  일주일 만에 뚝딱 해치웠다. 언처럼 감사기도가 터졌다.


"엄마! 스쿠터 너무 고마워요. 내가 스쿠터 갖고 싶은 건 또 어떻게 알고 사라고  보채셨나 ㅎ상담도 하기 싫다는데 엄마가 강제로 붙여준 게 신의 한 수였어. 보이스로만 하니까 오히려 편하게 얘기할 수 있었던 것 같고 처음엔 기싸움을 좀 했는데 지나고 나니까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그분에게 털어놓으면서 진짜로 도움 많이 받았어.


엄마나 상담사나 지금 담당 의사 선생님이나 거의 비슷한 얘기를 늘 했어요. 아팠지만 얻은 것도 너무 많고 그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오랜만에 진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드네. 가을도 참 예쁘고. 다 갚을게요. 쫌만 기다리셔. 담주에 친구랑 스쿠터 타고 대부도 가기로 했어. 엄마도 한번 태워줄게."

아들에게 선물한 스쿠터
브런치! 나에게 안부 물어줘서 참 고마워요.  나 이렇게 지내고 있었어. 막내아들도 우울증이 아예 없는 상태라니까 지금부터 좋은 일이 더 많겠지. 설령 또 쓰러지는 일이 있다 해도 그땐 별거 아닌 듯 툭툭 털게 될거야.
 ..치유의 계절..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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