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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ㅡ별꽃 Feb 14. 2023

낯선 길


인연

"커피 한잔 드릴까요?"

"정말요? 너무나  감사합니다."


전화통화를 했던 여자 사장님 대신 남자분이 안내를 한다. 털모자를 쓴 남자분 옆에서 꼬리가 떨어질 것처럼 반기는 반려견 리트리버와 마치 사람처럼 아빠를 끌어안고 곁눈질로   이방인을 바라보는 보도콜리, 두 아이 이름은 바우와 모리다. 별이는 몸집이 큰 두 아이가 부담스러운지 자꾸 안아달라고 보챈다.


시공을 초월해 유럽 어느 산속마을로 이동한 듯 클래식하면서도 고풍스러운 건축물 오지의 청정한 기운 탓인지 깊은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주방 문을 밀치는 순간 진짜로 유럽 어느 골목의 오래된 레스토랑에 온 것처럼 레트로 감성이 뚝뚝 흘러넘쳤다.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옆에 자리를 잡는다. 우연일까.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쇼팽의 즉흥환상곡'

오래된 궤종시계는 꾸역꾸역  태엽을 뒤로 감다. 아득한 여고시절, 처음으로 접했던  클래식. 은은한 커피 향에 향수는 짙어진다.


"우리 와이프랑 잘 통할 것 같아요. 우리 와이프랑 꼭 대화 좀 해보세요. 좋아할 거예요. 볼일이 있어서 서울 갔는데 곧 돌아올 겁니다.  글을 진짜 잘 씁니다. 여러 가지로 참 아까운 사람입니다."


해가 기우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보내며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을 기다린다.



방황

디로 가고 있는 걸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처럼 번잡했던 속세의 문을 넘자 거센 바람에 휘감겨 '툭' 내던져진 것처럼 생경한 풍경에 조금은 오싹했다. 새하얀 설원 사이로 난  구부러진 길을  천천히 달린다. 차도 사람도 없는 외길. 문득 지독한 고독함에 몸서리를 친다.  그나마 드문드문 보이는  민가가 있고 내 품에 별(반려견)이 있어 다행이다. 돌돌거리며 달려오는 난감처럼 작고 귀여운 보라색 미니버스와 스치는 순간 시간이 뒤로 '' 넘어지며 유년시절로 달려간다.


근  이십 년 가까이 주말마다 산에 올랐다. 백두대간, 낙동, 낙남정맥, 호남정맥, 영춘기맥, 땅끝기맥 등등. 산행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물리고 정상의 찬 공기를 폐부 깊숙이 밀어 넣을 때의 아찔함에 중독되면 도저히 끊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별이를 데려 온 후부터는  생활패턴이 완전히 바뀌었다. 견주들에게 반려견은 어린 아기와 같아서  오랜 시간 혼자 두면 불안하고 가여워 이도저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 그래서 산 대신 주말마다 별과 함께 하는 여행을 선택했다.


그날은 뭐에 씌었는지 인터넷 검색 중 갑자기 사진 한 장이 눈에 띄었고, 그 순간 여기다 생각했다. 그리고  즉시 숙소를 예약했다. 난생처음 가보는 .  나는 홍천 어느 외딴 마을 구부러진 길을 등줄기가 서늘해지도록 달렸고, 사방이 온통 새하얀 설원사잇길에서 까무룩 정신이 뒤로 넘어갈 지경에 이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창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한다.

소구름길, 비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자꾸 논으로 뛰어들한다. 몇 번을 같은 길로 안내하는 내비게이션. 어렵사리 인근 동네 주민을 만나 길을 물으니 비가 가르쳐준 대로 따라가란다. 이런.. 착시 현상이었다. 사방이 온통 흰 눈으로 덮여있어 논밭사이로 난 길마저 하얗게 보였던 게다.


첩첩산중 깊은 곳에 길이 나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산이 깊어질수록 두려움도 두터워지고 진짜 목적지는 있는 걸까 의구심이 들만큼 아~~~ 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온 걸까.

사납게 울부짖는 산새소리에 놀라 멈췄는데 세상에! 금방이라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아이들이 손잡고 빙글빙글 돌며 도레미송을  합창이라도 할 것 만 같은 저 풍경. 리트리버와 보도콜리를 양 옆구리에 껴안듯 품고 쪼그려 앉은 국방색 털모자를 쓴 남자는 숙소 주인이다.

"그림 그리세요?"

"아뇨. 그냥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평범해 보이지 않는데. 뭔가 예술 쪽으로 하시는 분 같아요. 음악 하시나?"

"아이고 아닙니다.  직장 다니면서 소소한 수필집 두권 냈습니다."

"거 봐요. 내가 사람 잘 본다니까.  우리 와이프가 좋아할 거예요. 틀림없습니다."


화가 잘된다. 봇물 쏟아진다. 무표정한 듯하면서 생각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 겹쳐 보인다.


소통

통나무로 만든 숙소, 나무향이 좋다. 툭 터진 창문너머 산락엔 눈이 하얗게 쌓였다.  밖에서 바우는 나오라 하고 별이는 싫다 한다. 나는 햇살이 늘어진 창가 둥그런 테이블 곁 의자에 앉아 목을 길게 빼고 먼발치를 내다보다 살짝 잠이 든다. 인기척에 벌떡 일어나 밖을 내다니 기다리던 안주인이시다.

봄동 먹는 바우

외부의 주방대신 게스트도 혼자고 날씨도 추우니 부부가 사용하는 주방을 마음껏 써도 된다는 배려에 간단하게 저녁을 챙겨 먹는다. 채소를 좋아하는 바우는 내가 싸간 봄동을 맛있게도 먹는다. 둘이 이야기를 나누라며 바깥 주인은 모리와 함께 자리를 비워준다. 짓궂은 바우는 나더러 등도 긁고, 목도 주무르고,  배도 만지라 한다.


벽난로에선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씨가 춤을 추고  우리의 대화도 깊어졌다.  안주인의 눈빛은 맑고 고요하며 단아하게 빛났다. 수정처럼 맑은 눈빛이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아기기 때문일까.

내가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후 5시부터 시작된 대화는 밤 12시 정도까지 이어졌고 억지로 끝내야 했다. 부모도 자식도 다 어려운 노릇이다. 손바닥 한번 안 맞고 이놈 소리 한번 안 듣고 자랐다.  아픈 자식이 있으니  차라리 내가 아프게 자랐다면 내 아이는 괜찮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생각에 목이 멘다.  그런 나도, 안주인도 늙어가고 있지만, 세상에서 절대로 늙지 않는 건 모성애가 아닐까 싶다. 누구에게도 깊이 꺼내보지 못했고 차마 할 수 없던 말들을 우린 서로 털어놓았다.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부자도, 평범한 사람도 자식에 대한 가슴 깊이는 다르지 않았다.


하늘엔 별이 총총 쏟아지고 둥글게 차오른 보름달이 유리알처럼 빛난다. 낯선 환경인 데다 산짐승 우는소리와 산새소리에 별이는 자꾸 내 품을 파고든다. 나도 몇 번을 가위눌림을 당하다 새벽녘에겨우 잠이 든다.


누군가의 글을 읽고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살갗에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하기가 쉽지 않다. 안주인의 글이 그랬다. 어지간히 인생을 달관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글이었다. 살과 뼈와 피를 녹여 쓴 글이라면 표현이 적절할까. 아니다. 표현이 어렵다. 나는 안주인의 짧은 글을 읽은 후 남겨진 깊은 여운에 힘을 얻고 있다. 세상의 이치란 그런가 보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것이고 고통이 있으면 반드시 기쁨도 있는 법이라고.


나는 괜 길을 떠나지 않았다.

(사장님이란 표현대신 안주인 바깥주인이 정겨워 그리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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