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의 추억을 간직하고 기록하는 방법으로 사진은 정말 좋은 방법이다. 평소에는 보기 힘들었던 풍경이나 사람들로 인해 저절로 카메라에 손이 가는 것도 당연하다. 동영상까지 찍는다면 그 순간의 현장감을 그대로 기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진을 찍고 나중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 사진을 얼마나 다시 찾아보았는가? 그 사진을 봤을 때 그 당시 느끼던 감정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가?
한때는 나도 여행을 하면서 참 많은 사진을 찍었다. 나름 사진에도 관심이 있어 DSLR을 들고 다니며 사진작가 인척 풍경과 인물을 찍기도 했다. 용돈을 털어 마련한 액션캠으로 여러 가지 영상을 찍고 편집해 나만의 비디오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 사진에 관심이 많을 때 제주도 여행을 갔다. 어디를 가든 카메라를 가지고 다녔다. 한 장소에서 DSLR로 찍고 액션캠으로 360도 전경을 담고, 핸드폰으로 셀카도 찍었다. 어디를 다니든 그렇게 분주하게 기록하기 바빴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난 후에 사진과 영상은 하드드라이브에 고이 잠들었고 아주 가끔씩 우연찮게 그것들을 꺼내 볼 뿐이었다. 사진 속의 풍경과 나는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정작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떠한 기분이었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 후 다시 제주도를 찾았는데 이번에는 좀 다른 콘셉트로 여행을 했다. 나의 애마였던 모터사이클을 타고 경기도 용인에서 출발해 전라남도 완도를 거쳐 배를 타고 제주도로 건너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철저히 혼자가 되어 앞으로의 내 인생에 대해서 혼자 조용히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목표였다. 사진을 찍기보다는 조용히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위해 1인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렀다. 낮이면 나의 모터사이클을 타고 제주도를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저녁에는 숙소에 돌아와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카페에서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나중에 돌아와 그 글들을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과 기분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또한 여행 과정 중에 글을 쓰면서 실제로 나의 고민과 생각들이 많이 정리되었음은 물론이고 온갖 물음들에 대한 답을 스스로 어느 정도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 그 여행 동안에 나에게 던진 물음과, 나름 해답을 찾아 나선 나의 글쓰기, 그리고 내 생각 정리를 도와주는 여행과 그 동반자인 책까지. 그런 일련의 시간들을 통해 지금 나의 삶을 방향을 다시금 점검하고 수정해서 올바르게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여행 중 각각의 장소에서, 시간을 들여 글을 쓰게 되면 진정한 여행의 힘과 그 매력을 만끽할 수 있다. 자신의 고민과 결심에 대해서 글을 쓰게 되면 여행이라는 것은 그 해답과 방향을 제시해 준다. 여행 그 자체에 대해서 글을 쓰면 그 여행을 백배 정도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 준다. 여행 글쓰기를 통해 같은 장소, 같은 시간일지라도 그 공간과 시간이 몇 배는 더 밀도 있게 변하기 때문이다.
이는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더 깊이 알게 된 내용이다. 책에는 영국의 사회비평가인 존 러스킨의 이야기가 나온다. 1819년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주변의 아주 작은 특징에도 민감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아름다운 것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을 인식하는 것”
그 방법으로 그는 데생을 사용했다. 데생의 목적은 그것을 잘 그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눈앞에 놓인 것을 시간을 들여 천천히 관찰하게 됨으로써 그 구성요소들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좀 더 확고한 기억을 가지기 위함이다. 이에 반해 사진이 나오고 나서부터는 오히려 세상에 덜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진은 너무나도 쉬워 내가 보는 것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러스킨은 여행을 하면서 스케치를 하라는 조언과 동시에 아름다운 것에 대한 인상을 확고히 굳히기 위해 말로 그려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보는 아름다운 풍경을 그냥 사진만 찍는 것이 아니라 풍경 하나하나를 글로 묘사하며 적으라는 것이다. 러스킨의 조언을 받아들여 나도 말 그림을 도전해 본 적이 있다.
제주도 어느 바닷가에 위치한 2층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해변을 내려다보며 말로 그려 보았었다. 사진을 찍을 때는 멋있다, 시원하다 라는 감정만 느꼈다. 반면 말로 그릴 때는 해변에 서 있는 사람 하나하나와 멀리서 변화무쌍하게 변화하는 구름과, 아름답게 점점 짙고 어두워져 가는 노을, 그리고 뜨거운 김이 어느새 빠져버린 바람과 같이 하나하나 자세하게 보게 된 것에 내심 놀랐던 기억이 난다. 말 그림을 그리자 이윽고 내가 보았던 것들은 껍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김훈의 에세이 책인 『자전거 여행』을 보면 이렇게 말로 그린다는 것의 진수를 볼 수 있다. 그의 여행은 보통의 여행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전거 여행』은 저자가 1999년 가을부터 2000년 여름까지 자전거를 타고 전국 산천을 다니며 쓴 여행기이다. 들과 산을 넘어, 강과 바다를 다니며 쓴 그의 여행기는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내곤 했다. 어릴 때부터 누구나 타 보았을 자전거도 그의 말을 거치니 색다르게 다가왔다.
“1단 기어의 힘은 어린애 팔목처럼 부드럽고 연약해서 바퀴를 굴리는 다리는 헛발질하는 것처럼 안쓰럽고, 동력은 풍문처럼 아득히 멀어져서 목마른 바퀴는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데, 가장 완강한 가파름을 가장 연약한 힘으로 쓰다듬어 가며 자전거는 굽이굽이 산맥 속을 돌아서 마루턱에 닿는다.”
이 글을 읽으며 어떤 모습이 떠올랐는가? 내 머릿속에는 가파른 경사를 오르는 자전거에 탄 저자가 생생히 보였다. 1단에 기어를 놓고 언덕을 오르기 위해 힘겹고 빠르게 발을 저어 가지만 1단 기어이기에 발 젓는 모습과는 상반되게 굉장히 느린 속도로, 그렇기 때문에 자꾸만 좌우로 흔들리는 자전거. 그 흔들리는 자전거의 핸들을 붙잡아 가며 언덕을 오르는 저자의 모습이 보였다.
저자의 말로 그리는 능력에 감탄하며 책을 계속 읽어 가던 중 반가운 장소가 나와서 좀 더 집중해서 읽었다. 그곳이 정작 내가 가본 곳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바로 태안반도에 있는 안면도인데 완전한 여름이 다가오기 전에 그곳에 일박이일로 아내와 여행을 갔었다. 나름 괜찮은 펜션을 잡고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 숲을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바다 구경도 하며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김훈이 다녀온 안면도는 내가 갔던 곳과 너무나 달랐고 그가 바라본 소나무 숲은 내가 그냥 대충 지나쳤던 보잘것없는 일반 숲이 아니었다. 그는 안면도의 소나무 숲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로 그리고 있다.
“곧고, 높고, 힘센 나무들이 자존의 거리를 정확히 유지하면서 숲을 이루어, 나무들의 개별성은 숲의 전체성 속에 파묻히지 않는다. 안면도의 소나무들은 붉고 곧은 기둥을 높이 올려가다가 맨 꼭대기에서만 가지가 퍼지고 잎이 돋는다. 아무데서나 가지를 뻗어 늘어뜨리지 않는다. (…) 안면도의 소나무들은 과도한 풍류와 과도한 표정을 안으로 다스려가면서, 높고 곧고 푸르다.”
이 글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다녀온 안면도라는 곳의 진면목을 깨닫게 되었다. 다음에 다시 가 볼 기회가 생기면 김훈처럼 그렇게 안면도를, 그 소나무 숲을 제대로 보고 올 예정이다. 이러한 시선을 가지고 여행하는 사람은 일반 사람의 여행보다 몇 배나 밀도가 높고 충족감이 높은 여행을 한다고 생각한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있어도 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느끼지 못하는 것에서 감탄하며 그것으로부터 자신 또한 감동받고 배우기 때문이다.
여행을 하면서 고민과 어려움,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말 그림을 그리게 되면 그 고민이 해결되는 것도 이러한 이치이다. 말 그림을 그리면 제대로 보지 못하던 풍경과 주변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자신에 대해 말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자신이 평소 생각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서 잘 몰랐던 것들, 혹은 알고 있었지만 외면했던 사실들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결국 자신의 물음에 대한 정답을 찾을 수 있다. 자신의 문제에 모든 답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여행을 떠날 때는 사진에 집착하기보다 노트와 펜, 그리고 책을 챙겨가길 바란다. 현실이 힘들고 새로운 길을 찾고 싶은 사람은 여행 동안 자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말 그림을 그려 보자. 좀 더 행복하고 충족감을 느끼고 싶은 사람은 자신이 다니는 곳곳에서 보고 있는 멋진 풍경을 말로 그려보자. 이렇게 노트와 펜으로 여행을 한다면 사진에서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느끼고, 그 누구도 알려줄 수 없었던 정답을 자신으로부터 찾을 수 있게 되는 진짜 여행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