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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과몰입장인 Jul 17. 2020

도덕적인 행동은 결과에 영향을 미칠까?

칸트와 니체 그리고 남양과 선한 영향력 운동

한때 정말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했지만 실패한 프로젝트가 있었다.

우리는 왜 실패했는지 몰랐다.


리더십 부족일까? 기술력이 부족해서일까?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해서일까? BM에서 부족한 점이 있지 않을까?

그렇게 의문만 남긴 체 우린 실패했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나고 동료로부터 한 줄의 카톡을 받게 되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실패하게 된 것 같아요."


나는 그 문장을 보고 나의 철학과 현실이 부딪치는 것을 느꼈고 이렇게 늦은 밤에 잠들지 못하고 키보드 앞에 앉게 되었다.


나는 도덕적인 행동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첫째로, 선한 행동이 선한 결과를 불러온다는 과정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착한 사마리안인은 과연 도덕적인 행동을 했을까?

예를 들어 굶고 있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도덕적인 행동이다. 이에 대해서 반론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가 커서 살인자 혹은 독재자가 된다면 그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비도덕적인 행위일까? 만약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결과가 원인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이것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성립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살인자가 될 굶주린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 하지만 결과는 도덕적이지 않다.


위 사고 실험이 작동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내가 생각한 이유는 세상은 단순히 하나의 원리로 이루어진 세상이 아니라 혼돈 그 자체 아니 혼돈이라는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세계이기 때문에 단순한 인과관계가 설정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가 내리는 판단 한 개로는 결과에 이르는데 놓인 수많은 변수들을 컨트롤할 수 없다. 즉, 우리가 도덕적으로 옳은 선택을 한다고 해서 세상 만물이 선한 결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신만의 규칙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도덕적 가치는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에게서 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사자는 도덕적일까?

오른쪽 사진에는 가젤을 사냥하는 사자가 보인다. 사자가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젤을 사냥해야 한다. 하지만 가젤은 생명이기 때문에 주체성을 가지고 있고 사자에게 먹혀야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사자가 가젤을 사냥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일까? 만약 그렇다면 사자가 가젤을 잡지 못했다면 그 행동은 도덕적인 걸까?

니체는 도덕을 해석으로 보았다.

니체는 기존의 이원화된 선악구조의 틀이 아니라 자연 상태의 비도덕성을 이야기하였다. 기존의 도덕주의는 동정심으로 가득한 인간을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니체는 도덕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다고 했다. 도덕적 해석만 존재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도덕적 가치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니체는 행위자에게 달려있다고 말했다. 니체는 행위 자체는 공허하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전쟁에서 적군을 죽인 병사를 명예롭고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고 찬양한다. 또한 무고한 사람을 죽인 살인마를 우리는 비인간적이라고 지탄한다. 하지만 둘의 행위는 모두 살인이라는 동일한 행위이다. 즉, 도덕적 행위는 의미가 없고 행위자가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안중근 의사와 오사마 빈 라덴은 무엇이 다를까?

그렇다면 다시 사자와 가젤로 돌아가 본다면 사냥을 한다는 행위는 도덕적 가치를 판단할 수 없다. 만약 사람이 재미 삼아 가젤을 사냥한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사자가 가젤을 사냥하는 것은 사자의 본능이자 의무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판단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어떤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동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게에 어수룩한 손님이 왔다. 가게 주인은 거스름돈을 조금만 돌려줘도 손님이 눈치채지 못할걸 알고 있다. 하지만 주인은 잔돈을 정확히 돌려준다. 왜냐면 소문이 퍼져 내 평판이 떨어지고 장사에도 피해가 가게 된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인이 거스름을 정확히 돌려준 행동은 도덕적인 행동일까?

칸트

칸트는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칸트는 도덕적인 행동은 "옳은 동기에서 나오는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 행동은 도덕적 가치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익이라는 잘못된 동기로 옳은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옳은 동기, 선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누구라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원칙을 가지고 살아간다. 칸트는 이것을 준칙이라고 하였다. 준칙이 개인에게만 적용될 때는 법칙이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특정 준칙을 인정한다면 그것이 법칙이 되고 그것이 도덕 법칙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도덕 법칙이 된다면 우리는 자발적인 존경을 가지게 되고 그 법칙을 나의 행위 준칙으로 받아들여서 따르기로 자발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의지를 선의지라고 한다. 선의지는 외적 강제성이 없이 발생해야 하고 그것에 대한 존경심이 생겨야 그것을 의무로 느끼고 스스로에게 부여하게 된다. 

인간은 자연의 본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또한 나약하고 악한 존재 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이기적인 프로세스가 작동을 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자율적인 선택과 선의지로 프로세스를 이겨내고 도덕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인간은 그 순간 본능을 이겨내고 자유 의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이러한 선의지가 아닌 다른 이유로 행동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것일까? 칸트는 아니라고 답한다. 우리는 선의지가 아닌 다른 이유로 행동을 하게 된다면 그 준칙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닌 우리 내부의 이기적인 프로세스로 인한 선택이고 그것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이야기하는 도덕 법칙이 아니게 된다. 따라서 칸트는 옳은 동기가 옳은 행동을 만든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세상은 달랐다. 

도덕적인 행동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남양 불배 운동의 결과

대표적인 예로 남양 불매 운동이 있다. 남양유업은 2013년도에 지역 대리점에 물건을 강매시킨다는 주장과 녹취록이 공개되었다. 이것은 대기업 갑질로 불리게 되었으며 영업 사원이 대리점주에게 욕설을 하는 녹취록이 공개되었고 이것을 공개한 점주를 상대로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하면서 냠양 유업에 대한 이미지는 나락으로 추락하였고 업계 1위에서 매일유업에 밀리며 막대한 영업 손실을 보게 되었다.


선한 영향력의 전파

하지만 이러한 예시도 있다. '진짜 파스타' 오인태 대표는 결식아동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는 선행을 베풀었다. 이러한 사실은 네티즌을 통해서 급속도로 확산되었으며 위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먹어서 혼내주겠다며 '진짜 파스타'는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었고 결식아동들에게만 주던 무료 식사를 소방관님들에게도 전달해 주면서 점점 '선한 영향력' 운동은 커지게 되었고 지금은 400곳이 넘는 가게들이 함께 하면서 '선한 영향력' 운동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다.


위 두 사건뿐만 아니라 최근 뉴스에 나온 사건 사고 들을 보면, "과연 '사필귀정', '인과응보'와 같은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 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절대자가 존재하고 그가 선택을 한다는 것일까?


칸트가 말하길 최고의 선은 도덕과 행복의 결합이다. 즉,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하면서도 내가 행복하면 그것이 최고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도 있다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하더라도 행복이 따라오지 않을 수 도 있다. 위 경우 우리 안에 있는 선의지의 목소리를 들을 것인지 아니면 우리 안에 있는 이기적인 목소리를 들을 것 인지 갈등하게 된다. 칸트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옳은 일을 하라고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옳은 일만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없다. 

칸트는 이 상황에서 신을 이야기 한다. 다만 이때 말하는 신은 우리가 아는 종교관 안에 신이 아니라 '이성 신앙'이라 불리는 신이다. 칸트는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했지만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인간을 도덕적이고 행복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도덕과 행복의 일치를 위해서 외부의 힘이 필요했고 그것이 신이었다. 최고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신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었다.


아직 난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른다.

내가 이론적으로 배운 도덕과 결과에 대한 상호관계와 내가 실제 몸소 보고 배운 도덕과 결과에 대한 상호관계 중 어떤 것이 옳은지 모른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수많은 철학자들의 생각을 듣는다고 해도 알 수 없을 수도 있다. 다만 칸트의 말처럼 신이 존재해서 도덕적인 선택이 좋은 결과로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 일 것이다.



참고

[지혜의 향연] 선과 악, 그 불분명한 실체 - 「칸트와 니체」 (백승영 교수)

하버드 특강 '정의' 제06강 임마누엘 칸트의 도덕론

칸트의 도덕적 신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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