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시간이 남아서 찾아봤어요.

by 뚜비뚜밥

그날도 무척이나 날씨가 좋았다.

식물원, 벤치, 햇살, 바람, 그리고 그.


그 옆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서,

그가 “사귀자”고 말하면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일 거라는 걸 알았다.


근데 그는,

큰 강아지를 끌고 온 옆 자리 커플을 보더니 물었다.

“애완동물 키워본 적 있어요?”

“아뇨, 엄마가 알러지 있으셔서 못 키워봤어요. 키워보고 싶긴 해요!”

“저도 안 키워봤어요.”


…아니 지금 애완동물 얘기하게 생겼냐고.

자기도 키워본 적 없으면서.

그 말 왜 해.

제발 나랑 사귀고 싶다고 말해.


나는 속으로 대사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었다.

‘저랑 만나실래요?’

‘저 어때요?’

‘우리 사귈까요?’

아 대사 구리다.

왜 이렇게 구리지…


진짜 한 번도 내가 말해보고 싶었던 적 없었는데,

막상 말하려니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구나?


그러는 사이,

MBTI가 JJJJ인 그는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어, 부동산 약속시간 아니에요?”

그는 나를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이런.


이제 막 애써 입천장까지 끌어올린 ‘사귀자’는,

그 한마디는,

그날 햇살처럼 맥없이 흩어져버렸다.


겨우 흩어져 가는 마디 마디를 붙잡아,

“혹시 저 집 보러갈 때 같이 가실래요?”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좋다고 했다.


휴, 다행이다.

데이트다운 데이트는 아니다만,

그래도 몇 시간 더 같이 있을 수 있겠다 싶어 그저 좋았고 고마웠다.



한참 집을 보여주던 부동산 사장님.

갑자기 그에게 묻는다.

"남자 분은 무슨 관계이신지 모르겠지만 어떠세요?"


그와 나는 침묵 속에서 동시에 당황해서 눈이 마주쳤다.


사장님 왈,

“아니, 보통 남자 분들이 이래라 저래라 말씀이 많으신데 조용하시길래 궁금해서요.”


’아니, 무슨 관계인지 모르면 그냥 묻질 마세요.’ 싶다가도

그래, 집을 같이 보러 왔는데

둘이서 같이 살 것 같진 않으니

참으로 이상하기도 하겠다 싶다.

진작부터 궁금했는데,

한참 참다가 이제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나보다 싶다.


그는 담백하게 말했다.

"제가 살 집이 아니라서, 제가 의견 드릴 건 없을 것 같아요."


맞는 말이긴 한데,

나는 조금 서운?이라 하기는 그렇고 묘한 감정이 들었다.


당연히 살 집 아니시긴 한데,

관심 없을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랑 같이 가주셔서 감사한데,

그래도 같이 온 김에 좀 봐주실 수도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는 나와 시간을 보내려고 온 거지,

집을 볼 필요는 정말 없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집을 안 볼 건데도 흔쾌히 따라와 준 그에게 더욱 고마워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취를 해보지 않은 그가

무엇을 봐야 할지 모를 수도 있겠다, 그저 신기하겠다 싶기도 했다.


보다 보니 늦어져서 늦은 시각에 열려있는 거라곤 치킨집 하나였다.

나는 치킨을 엄청 좋아하는데, 다행히 그도 좋다고 해서 같이 갔다.


배고팠던 나는 닭다리를 한 손에 들고 그에게 말했다.

예상에 없던 일정이었을 텐데 같이 가줘서 고맙다고.

집 구경은 어땠는지, 그리고 혹시 오늘 본 것 중에 어디가 그나마 제일 나은 것 같냐고도 물었다.

사실 아무 생각 없었을 거라 생각해서 별 기대는 없었다.

집을 안 보러 가본 사람의 경험이 그저 궁금했다.


근데, 어랏?


솔직히 말해서 이 동네는 별로인 것 같다고 한다.


교통, 채광 같은 건 물론이고,

앞으로 과연 미래에도 이 동네가 이 정도까지 비쌀지 자기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집안도 그렇고, 동네도 별로인데

왜 이렇게 비싼지 이해가 잘 안 간다고.

나중에 이사해야 할 때 세입자 못 구해서 어려워질 수도 있다고.


맞는 말이다,

지금 나도 금리 폭등으로 아무도 이사 올 사람 못 구해서

진작에 이사 가고 싶었지만 못 가고 결국 6개월을 채우는 중인데

내가 지금 사는 동네보다 이 동네는 더 심할 거라고 등등..

그는 집안과 동네에서 관찰한 것에, 거시 경제까지 엮어서 한참 동안이나 말을 이어갔다.


이 남자 뭐야?


진지하고도 섬세한, 그리고 예리한 그의 반응에

나는 이미 제대로 빠졌다는 걸 알았다.


그는 사실 부동산 사장님께 말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고 했다.

나에게 얘기해주고 싶었다 했다.


정말 그런 것 같았다.

그는 내가 못 보는 부분까지도 보고 있었다.


갑자기 또 생각났다.

아, 나 오늘 이 남자한테 사귀자고 할려고 했지.


치킨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말해보려고 했는데 집 얘기를 한참 하느라 타이밍을 놓쳤다.

지하철 타러 가는 길에 말하려고 했는데 정말 입이 안 떨어진다.

용기는 있었는데, 자신이 없었다.


하루종일 집 보고나서 내가 "우리 사귈래요?" 하면

너무 정신없는 애 같지 않을까…?

집도 못 챙기면서 사귀자고 하는 사람이랑 안 만나고 싶으면 어쩌지 싶다.

말했다가 본전도 못 뽑는 거 아니야?

그래, 다음을 기약하자.


우리는 여느 때처럼 '다음 주에 봬요', 하고 헤어졌다.



다음 날 오후,

한참 일하고 있는데 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이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한다.


아무 생각 없이 알려줬더니,

시간이 남아서 찾아봤다며 파일을 보낼테니 시간 날 때 보라고 한다.


퇴근 길에 열어보니,

어제 내가 말했던 비슷한 조건의 서울의 다른 집들을 20개 정도 찾아서 정리한 엑셀파일이었다.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금액은 물론 주소와 평면도 그림 등등 거의 모든 것들이 알차게, 깔끔하게 정리된 파일.

이사를 참 많이 해봤지만 이렇게까지 정리한 적은 나조차도 없다.


아, 이 남자 쐐기를 박는구나.


이 사람이랑 같이 살 집을 찾는다면,

나 혼자가 아니라 같이 찾을 수 있겠다는 상상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찾은 집 중에 내가 고려할 만한 곳이 없긴 했다.

그가 고른 집들이 관리비가 폭탄이거나,

기차역 앞이라 시끄럽다거나 하는 것들은 전혀 몰랐던 것 같지만 그럼 어떤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 마음이 너무 예쁘고 고마웠다.

시간 남아서 해봤다는데, 시간 남아도 할 게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문득, 지난 주말에 마음에 드는 집이 없어서

이번 주말에 다른 동네로 집을 보러 가야 하는데,

분명 집부터 찾고 나서 사귀자고 해야 이 사람이 날 만날 것 같은데,

그래서 진짜 열심히 집을 알아보고 있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보다 남자친구가 먼저 생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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