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을 기억하는 방식

by 가은

파리에서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기차에서 네게 편지를 써. 의자에 기대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하염없이 창밖 풍경을 바라봐. 유럽의 날씨는 알 수 없다더니 풍경의 색깔은 계속해서 빠르게 변하고 있어. 눈부신 햇살을 한 줌 담아낸 샛노란 엽서 같다가도 어느새 갑자기 안개가 잔뜩 끼고 때때로 빗방울이 스치는 연회색 필름사진이 되곤 하네. 쉴 새 없이 변하는 장면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마치 내가 삶을 기억하는 방식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


나는 특정한 시절을 장면으로 기억하는 편이거든. 어떤 시간을 떠올릴 때면 특유의 온도와 색감이 담긴 찍힌 사진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시간은 분명 끊기지 않는 영상의 개념에 더 가까울 텐데 나의 기억은 왜 이토록 오래된 필름 사진 같은지. 분명 당시엔 길고 길었을 시간들은 단 몇 장의 사진으로 압축되어 그 시절의 많은 기억을 대신하곤 하지. 그렇게 때론 새파란 하늘 같다가도 금세 시리고 먹먹해지던 다채로운 나의 계절들은 소중하게 추억이라는 사진첩에 꽂혀 보관되고 있어.


이번 출장은 어떤 장면들로 기억될까? 따스한 온기의 사진들을 한 아름 가져가고 싶어서 파리에서의 기억을 다시 재생해보고 있어. 미숙함을 감추고 잘 해내고 싶어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도, <비포 선라이즈>의 한 장면 같은 기차 안 식당칸도, 공항에서 숙소를 가던 길에 처음 마주한 파리의 야경도 모두 잊을 수 없도록. 선명한 사진으로 오래도록 기억되도록.


곧 기차에서 내려야 할 시간이야. 다시금 부지런히 창밖 풍경을 두 눈에 담아. 힘들고 고된 기억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자리엔 빛나고 행복한 기억들만 어느새 자리 잡겠지. 이 기차에 어떤 것들을 두고 내리기로 해. 수없이 어긋나고 또 어긋났던 마음의 방향, 차마 답장할 수 없는 편지묶음, 스스로를 잃고 애쓰던 무기력한 시간들. 그것들을 오래 품었으니 이제는 기꺼이 보내기로 해. 새로운 종착지로 가는 이 여정에서 말이야. 여행이 아름다운 건 결국 내려야 할 목적지가 있어서일 테니. 내일을 알 수 없지만 결국 흘러갈 곳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물결 같은 삶처럼.


매번 출장 때마다 바쁘다는 핑계로 네게 편지를 쓰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짧게나마 남길 수 있어서 기쁘다. 네게 잊고 싶지 않은 장면들을 더 많이 추억으로 선물하기 위해 부단히 행복해져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줄일게. 때론 혼자인 것 같고 다시 반복되는 것 같을 때면 늘 네가 함께한다는 사실 잊지 않을게.


2025년 1월,

프랑크푸르트에서 네 친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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