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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한 Jun 15. 2023

포스트 모더니즘 비판과 동양철학의 삼의(三義)

왜 올바른 기준이 있다고 단정하고 시작하죠?
인생의 정답, 절대적 진리가 존재할까요?

절대적 기준이 없다라는 생각을 철학적인 용어로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부릅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절대적인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고로 모든 것은 동등하다"라는 것입니다.
(라이프코드 디스코드 멤버들의 질문과 답글 중)


포스트 모더니즘의 아이러니는 "정답은 없다"는 말을 마치 '정답'처럼 말하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절대적 상대주의'랄까요?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장•방식대로라면, 메타적으로 볼 때, '(절대적) 상대주의'조차 하나의 의견일 뿐이므로 '(상대적) 절대주의'와 양립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혹은 모더니즘의 안티테제로 등장한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이나 사조 자체도 무의미하게 셀프-해체할 수 있어야 하겠고요. 결국 포스트 모더니즘은 그 내용과 형식이 결코 조화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명백한 한계와 모순 속에서 성립된 모래성 같은 철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직 '상대주의'에만 집중하는 포스트 모더니즘과 달리 동양철학의 역학에서는 '삼의(三義)'라는 세 가지 이치를 함께 이야기합니다. 삼의에서 절대계의 불변하는 이치를 '불역(不易)', 현상계의 변화하는 이치를 '변역(變易)', 우주 변화의 쉽고 간단한 이치를 '간이(簡易)'라고 하죠. '모든 것은 변한다'는 <변역(變易)-상대성>의 이치와 '변한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불역(不易)-절대성>의 이치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동시에 병렬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의 서양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부동의 동자'라고 해서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되(불역) 세계를 움직이게(변역) 하는 존재(불역)'를 말한 바 있죠] 나아가 '일정한 질서 안에서 변화할 뿐이다'라는 <간이(簡易)-합리성>의 이치를 말하며 일정한 질서를 밝히는 '학문'의 존재 이유, 성립 가능성도 함께 보여주고요.


위의 맥락에서 삼의를 확장해보면 불역은 '근본원리(본질)', 간이는 '보편법칙(인과)', 변역은 '개별사물(실존)'을 대표한다고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대로 된 학문의 이론은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근본원리(본질)'를 손에 잡힐듯 쉽고 간결한 '보편법칙(인과)'으로 실체화한 것이라 볼 수 있죠. 학문의 방법론으로 '개별사물(실존)'에 처해서는 치열한 경험의 데이터를 통해 이론을 귀납적으로 탐구할 수 있을 테고, '근본원리(본질)'에 대해서는 이성을 통해 이론을 연역적으로 탐구할 수 있겠죠. 또한 '근본원리(본질)'와 관해서는 명상을 통해 이론을 초월적으로 직관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본질이 있다는 전제 하에 이 두 방향에서의 탐구가 모두 이뤄져야 올바른 이론이 밝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실존의 귀납적 탐구를 통해 점점 정밀해지는 '개연성'을 획득해갈 수 있을 테고, 본질의 연역적 탐구를 통해 결코 흔들리지 않는 '필연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며, 본질의 초월적 직관을 통해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진리'를 인가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근대의 서양철학자 칸트가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고 말했듯, '본질 없는 이론은 불가능하고, 실존 없는 이론은 무의미하다'고 응용해볼 수 있겠죠.


서양철학을 전공하지 않아 섣불리 얘기하기에는 조심스럽지만, 포스트 모더니즘 식의 '반대를 위한 반대'는 어쩐지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며, 동양철학의 역학처럼 <전체적인 안목에서 이뤄지는 균형 잡힌 정반합>이어야 자명해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객관성에 치우친 모더니즘(정)과 주관성에 치우친 포스트 모더니즘(반)을 넘어서 이제는 객관성과 주관성의 균형이 잡히고, 실존과 본질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시대(합)로 나아가야 하고, 이미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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